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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계가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혁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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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영국 사진작가 앨리슨 바틀릿은 눈이 아닌 소리로 사진을 찍는 작가다. 1992년 당뇨병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평소 취미였던 사진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으로 승화시켰다. 자연과 생명을 카메라에 담아온 그는 이제 소리로 장면을 포착한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 자연의 움직임을 담는다. 시각장애인이 사진이라는 시각예술에 도전할 때, 사진의 본질 자체를 다시 숙고하게 만드는 혁신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보여준다.

 세계적인 뮤지션 스티비 원더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갑자기 암전(暗轉)이 되면서 어둠 속에서 그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였다. 우리 모두는 스티비 원더가 세상을 인지하듯 어둠 속에서 그의 피아노 소리와 노래에 집중했다. 눈을 감자 귀가 열렸고 피부가 소리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독창적인 노래를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던 순간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준 순간이었다.

 장애를 가졌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나라가 건강한 사회다. 장애를 비정상이나 열등으로 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대할 때 그 사회는 혁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바로 그 다양성이 그 사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귀울림 증세의 메니에르병을 앓아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이 조울증으로 이어졌지만, 그 고통을 창조적으로 승화한 그의 작품들 덕분에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감동을 얻는다. 독주 압생트를 즐겨 마셔 황시증에 걸린 그는 ‘해바라기’처럼 불타는 노랑색을 그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계기가 될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매년 반 고흐 덕분에 수조원을 벌어들이고 있는 네덜란드는 그에게 잔인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2008년 제정돼 5년을 맞은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오는 4월 11일부터 확대 적용된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앞으로 장애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덜 힘겨워지길 기대한다. 외려, 우리 사회가 날마다 한계를 극복하며 사는 그들에게 자칫 놓치고 지나가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깨닫는 기회를 배우게 되길 바란다. 모든 것이 충분히 주어지고 자유로운 환경이 제공될 때 창의성이 고양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종종 한계에 직면했을 때 혹은 제약을 만났을 때 창의성은 더욱 발휘된다. 그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 그 한계를 정면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생각을 잉태한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턱없이 부족한 패드 위에 전자기판들을 빼곡히 밀어 넣은 ‘아이팟 나노’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우리가 혁신적이라고 느꼈듯 말이다. 날마다 한계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우리는 ‘한계 극복의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확대 적용됨에 따라, 이제부터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웹 접근성 준수가 온라인 쇼핑몰, 포털 등 모든 민간법인에게 의무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시각장애인도 인터넷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우스를 웹사이트의 글자들 위에 올려놓으면 소리가 들리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동영상을 올려놓을 때에는 자막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

 이런 차별 금지법 확대는 오히려 뛰어난 기술이 세상에 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오랫동안 연구돼 온 음성 지원 소프트웨어, 자동 자막서비스 기술 등이 더 정교하게 발달할, 그리고 상용화될 기회를 이제 갖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혜택은 장애인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마치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에스컬레이터의 혜택을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상식적으로 규제는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라 여겨지지만, 오히려 혁신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우리가 배웠으면 좋겠다. 거리에서 장애를 가진 분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사회, 일터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는 사회, 장애가 행복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1인당 GDP 3만 달러 시대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정상, 비정상을 가르고 우열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혁신의 원동력을 얻는 세상이 곧 우리의 희망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생각의 장애’가 혁신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