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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디지털화 선구자, "수천 쪽짜리 법전을 언제까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벽을 둘러싼 책장에 가득 꽂힌 법전, 큼지막한 책상엔 산더미 같이 쌓인 소송 서류. 법조계 인사들의 사무실은 이런 모습이다. 법조계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날로그’적인 분야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기업은 물론이고 관공서조자 사무 대부분이 전자문서로 만들어지고, e-메일과 스마트폰으로 전송돼 서명과 보관까지 전자적으로 이뤄지는 방식으로 진화했지만, 법조계에선 아직까지도 업무의 상당 부분을 두꺼운 종이 문서와 법전에 의지한다.

이런 법조계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는 법원이 전자소송을 통해 디지털화를 유도하고 있다. 소송서류를 전자문서로 주고 받아 접수와 문서수발의 번거로움을 없애고 있다.

안기순 로앤비 대표

민간 영역에서는 ‘로앤비’가 선두에 서있다. 법령과 판례, 법조인과 법조기관, 소송절차 안내와 생활법률까지 한데 모아놓은 ‘로앤비 법률정보’라는 앱을 만들어, 출시 2년만에 누적 다운로드 14만건을 기록했다. 2만 명 안팎의 법조인이 고객의 전부인 점을 고려하면 폭발적인 인기다. 안기순(43ㆍ사진) 로앤비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산더미 같은 소송 기록에 둘러싸여 수천 쪽짜리 법전을 뒤적이겠느냐”며 “결국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법률 포털을 찾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변호사다. 1997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을 수료했고(27기), 법무관으로 군대를 마쳤다. 하지만 그는 학창시절부터 정보기술(IT) 광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판례 검색 프로그램을 만들어 동기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군 제대후 곧바로 법무법인 태평양에 입사했는데, 그에게 주어진 일은 당시 회사에서 구상한 ‘사이버 로펌 설립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이름은 로앤비. 몇년 뒤 로앤비는 태평양에서 독립했고, 2008년부터 안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안 대표는 로앤비를 “법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는 ‘법률종합포털’”이라고 소개했다. 로앤비는 홈페이지를 통해 법령 8만4000건, 각종 서식 15만건, 판례 17만1000여건, 법조인 2만1000명 등 법조계와 관련한 최신ㆍ최다 정보를 서비스한다. 스마트폰용 앱은 이 종합정보의 휴대형 버전이다. 안 대표는 “법조계 밖의 사람들에겐 생소하겠지만 법조계에선 필수 ‘즐겨찾기’ 사이트”라고 설명했다. 현재 법원·검찰은 물론이고 김앤장ㆍ태평양ㆍ광장 같은 대형 로펌과 국회를 비롯한 각종 지방자치단체, KTㆍ포스코ㆍ한국전력 같은 대기업, 전국 로스쿨 25곳이 유료 회원이다. 한국판 웨스트로(Westlawㆍ미국의 대표적인 법률정보사이트)인 셈이다.

“네이버 같은 종합포털에서 무료로 쉽게 법률 지식을 접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포털에 흘러다니는 법률 정보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필요한 정보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 다음은 정보를 찾더라도 신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반면, 로앤비에선 적재적소에 맞는 최신 정보를 제공한다. 까탈스럽고 자존심 강한 법률 전문가들의 신뢰를 얻는 이유다.

물론 사업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종이에 집착하는 법조계의 두터운 인식을 깨기도 어려웠지만 ‘서비스는 공짜’라는 선입견이 대표적인 서비스 분야인 법조계에도 팽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 법무실에 들러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 달라’고 두시간 동안 설득해 간신히 ‘아이디(ID)’ 한개 팔았다. 직접 써보고 편리하면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디를 사무실에서 돌려쓰더라”며 초창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결국 처음 5년은 내리 적자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데이테베이스(DB)를 축적했다. 기술 개발에도 매달렸다. ‘3단 비교보기’(법-시행령-시행규칙을 한 화면에 띄보 비교하는 방식), ‘판례 히스토리’(판례 상하급심과 참조 판례를 상하좌우로 제공) 같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콘텐트로 회원용 홈페이지를 채워나갔다. 결국 입소문을 타고 회원이 늘면서 어느새 회사가 자리를 잡았다. 최근 3년 동안엔 매출이 연 10%씩 성장했다. 이같은 성장세를 눈여겨본 세계적인 금융정보 서비스회사 톰슨로이터가 지난해 로앤비를 인수했다.

안 대표는 로앤비의 핵심 성장비결로 ‘쉼 없는 업데이트’를 꼽았다. 그는 “1년에 1000개 이상의 법령이 바뀌는데 제때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죽은 서비스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로앤비는 제휴한 곳에서 단순 DB를 받는데 그치지 않고 각종 로펌에서 내는 인사발령 자료나 신문의 개업인사 광고까지 챙겨 서비스되는 정보에 반영한다. 40명의 전체 직원 가운데 15명이 업데이트만 전담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로앤비의 주 고객은 아직 법조계로 한정돼 있다. 그의 말처럼 “보통 사람들은 일생동안 재판이나 수사를 받을 기회가 한 번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조계 밖으로 고객층을 확대할 구상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는 “2년 전 무료로 스마트폰용 앱을 출시한 것도 그런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전망은 밝다고 자신했다. 그는 “로스쿨 졸업생이 쏟아지면서 법조인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 기회”라며 “정부나 기업 등에서 법률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도 결국 디지털과 모바일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게 그의 판단이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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