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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얼룩진 초봄 주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초봄의 주말인 18, 19일 이틀동안 첩살이하던 중년여인이 재계 거물인 내연의 남편과 나이 어린 양녀를 찔러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는가 하면 다섯 식구가 불타 죽고 네 식구가 「개스」 중독사하고 화재교통사고가 잇달아, 초봄의 주말이 어수선하게 지샜다.
18일 낮 2시반께 대한증권협회회장 지덕영(55.서울삼선동27의4)씨의 내연의 여인 이춘현(32.삼선동119)씨가 생후 5개월 된 양녀를 질식시켜 죽이고 밤10시께엔 집에 들렀다가 본가로 가려던 지씨의 등과 배를 가위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이 여인은 범행후 자신도 과도로 양팔과 옆구리를 찌르고 음독, 중태에 빠져 이웃이 계영외과에 입원했다.

<범행경위>
이 여인이 사건 전날인 17일 밤에 찾아온 지씨에게 『하룻밤도 같이 지낼 수 없어 고독해 죽겠다』고 불만을 털어놓자 싸움이 벌어져 새벽3시까지 싸우다가 지씨가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지씨로부터 본처와 싸웠으니 「동해루」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야길 하자는 전화가 왔으나 이를 거절, 곧 어린애를 죽이고 저 세상에서 같이 살자는 유서를 써두고 지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18일 밤 8시30분쯤 지씨가 오자 술을 실컷 마셨다. 피곤하다고 먼저 잠자리에 든 지씨는 곧 깊은 잠에 들었다. 이 여인은 지씨와 문어다리를 잘라먹던 가위로 지씨의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왜 이러느냐』고 일어나는 지씨의 배를 미제과도로 다시 찌르자 지씨는 넘어졌다.
이 여인은 곧이어 진정제 50알을 먹고 과도로 자신도 양팔과 옆구리를 찔렀다.

<이 여인의 주변>
9살 때 순경으로 있던 아버지가 죽자 홀어머니와 언니(이영미)밑에서 어렵게 자라던 이 여인은 성신여고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이 무렵 아버지의 친구인 지씨가 나타나 생활비를 대어주고 딸같이 돌봐 주었다.
의지할데 없던 이 여인은 처음 지씨를 아버지로 대했으나 차츰 정이 들자 동거하게 되었고 정식 결혼하자고 요구해왔다고 한다.
지씨는 이 여인에게 매달 10여만원의 생활비를 대어주었으나 본가와의 관계로 자주 들르지 못해 이를 비관한 나머지 늘 같이 죽자고도 했다는 것. 이 여인은 『지씨가 10년 후에 아들이 미국유학에서 돌아오고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후 결혼하자고 하나 고독해서 못살겠다. 사랑하는 그이를 두고 혼자 죽을 수 없다. 저 세상에서 같이 살자』는 내용의 피묻은 유서를 남겼다.

<지씨 주변>
지덕영씨는 경기중학을 졸업, 상공부 상역 국장을 역임한 후 재계에 들어서 서울증권사장, 대한증권협회회장이 되었다. 지씨는 한때 명보극장을 경영하는 한편 대한극장협회회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스타·필름」사장으로 영화계에 손을 대기도 했었다. 본가에는 부인 이경자(44)여사와 2남4녀가 있다. 양녀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어 작년 연말 한일병원에서 부모없는 2개월된 여아를 양녀로 맞아들였던 아기였다.
지씨의 집에서는 『자녀들에게 퍽 다정했으며 세심한데까지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온 아버지가 설마 이렇게까지...』하며 차녀 문희양이 울먹이며 채 말끝을 맺지 못했다.
한편 서울 성북서는 20일 이 여인을 살인혐의로 입건 현장검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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