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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과 하의 여성들|시장부인에서 「바·걸」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대로엔 데모소동 「바」속은 딴 세상>
「가톨릭」신도들이 「데모」를 벌인 밤이었다. 「사이공」중앙대성당으로 통하는 「파스텔」가에는 「데모」군중이 웅성거리고 성당 앞 광장에는 불길이 휘황했다.
「사이공」강변 「나이트·클럽」「미풍」에 들어서자 나는 「데모」니 허수아비의 화형이니 하는 어수선한 바깥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플래쉬」를 비쳐 손님에게 자리를 안내할 정도로 장내는 어두웠다.
「샹송」과 중국노래가 뒤섞인 것 같은 애조 띤 여인의 노래와 조용한 「밴드」의 「멜로디」. 혼란과 내일에의 불안에 저항하는 것인가? 마치 하룻밤에 모든 청춘과 인생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듯 그들은 선율 속에 젖어들고 있었다. 「베트남」의 남녀 대학생, 「샐러리맨」, 군인, 순경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했다.

<예쁜 이의 고향은 베트콩지역 저쪽>
「메콩·델타」지방 「칸토」에서 왔다는 「뚜엣」(예쁘다는 뜻)양이 내 옆에 앉았다. 나를 안내한 Y씨와는 구면인 모양이다. 상냥하고 눈이 큰 남국의 미녀는 21세. 17세때 결혼, 무슨 사연으로인지 이내 남편을 여의었다는 것. 고향「칸토」에서 함께 살던 미군은 딸 하나를 남긴 채 떠나버렸다. 딸과 친정 어머니는 지금도 「칸토」에 있고 「뚜엣」은 생활전선으로 나섰다는 얘기다.
지난 구정에 딸과 어머니를 만나러 「칸토」에 다녀왔다고. 그는 언제든지 장거리 「버스」를 타고 「베트콩」지역을 지나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뚜엣」양은 Y씨에게 팔을 당겨 늘이고 애상적인 선율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아침 그 곳 신문은 「사이공」시내만도 밤의 여인이 1만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디안」 소장 따님은 「비둘기」부대 누님>
「퀴논」에서, 맹호 8호 작전으로 평정시킨 마을에서 만난 여인이 생각났다. 남편을 「베트콩」에 빼앗긴 여섯 아이의 어머니. 한국군이 추수를 도와주어 수월했다는 말을 했지만 거친 손과 피곤과 허탈에 주름진 피부에서 29세의 젊음을 찾아볼 길이 없었다.
많은 월남의 여성은 20전에 두 세 아이 가진 채 홀어머니가 되고 손바닥이 곰의 발바닥이 되도록 농사를 지어 아이와 집안을 지키든지 그것을 이겨 살지 못하면 도시로 나와 「뚜엣」양처럼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디안」에서 만난 비둘기부대 월남누님들도 생각났다. 25세의 막내여동생(사이공대 법대생)과 함께 40이 넘도록 혼자사는 옛날 「디안」소장의 딸. 비둘기부대 장병들은 누님 댁처럼 드나들며 지낸다.
부모는 20전에 여의고 두 남동생 중 한 사람은 불·인 전쟁 때 전사하고 또 한 동생은 「베트콩」의 총탄에 생명을 잃고 말았다. 부모와 동생들의 무덤을 한 울 안에 모시고 재목상·방앗간·「시멘트」·음료수 등 도매상을 거뜬히 경영해서 옛날 소장의 생활면모를 그대로 유지하는 월남의 또순이 「팜·히·양」 양은 이 판에 결혼해보았자 마찬가지 아니겠느냐고 자신 있게 웃어 보였지만 체념 뒤에 숨은 여인의 슬픔이나를 당황케 했다.

<여성의 길 뒤바꿔 전쟁은 정말 싫다>
여러 차례 만나주기를 청한 끝에 마주앉은 「반·반·쿠어」「사이공」시장부인은 또렷또렷한 어투로 내게 반문했다.
『그 문제는 한국과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겪었으니까 잘 아실 텐데….』
월남전이 확대되자 월남 여성생활에 변한 것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점인가를 질문 했을 때의 대답이었다.
전쟁은 많은 여성들의 행로를 뒤바꿔 놓았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가혹한 문제라 했다.
월남 여성처럼 평화에 대한 염원이 간절한 사람은 없을 거라 했다. 「하노이」에서 태어나 「후에」에서 고교를 나오고 「사이공」대학 의대 출신인 대표적인 「인텔리」. 그의 오빠는 3군 방첩대장 겸 경찰국장인 「로안」준장. 월남여인의 생활이 황폐해졌다면 누구의 책임으로 생각하느냐고 되묻는 듯하던 표정도 잊을 수가 없다.
갑자기 「밴드」「멜로디」는 아리랑으로 변했다. 모두 슬픈 가락 속에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었다. 11시 30분, 「뚜엣」 양은 Y씨에게 매달리듯 팔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자기도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바오치」(기자)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기자는 그 말에서 한 가닥 구원과 같은 것을 느껴보려고 가슴속 깊은 생각의 언저리를 혼자 더듬고 있었다. 【서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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