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늙은 유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말 실수가 잦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뉴욕대 언론학 교수인 마크 크리스펀 밀러가 그의 문제를 '부시의 언어장애'라는 책으로 다뤘다.

밀러 교수는 문법의 기본적인 규칙조차 무시하는 많은 사례를 적시했다. 예를 들어 '악수를 했다(have shaken hands)'고 해야 하는 대목에서 과거분사 'shaken'대신 영어사전에도 없는 'shaked'를 사용한다든지, 'Is our children learning?'에서 보듯 복수형 be동사 'are'를 써야 할 곳에 'is'를 사용한다는 등이다.

형용사 few의 비교급을 'fewer'라고 하지 않고 'more few'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되면 말 실수가 아니라 무식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부시의 진정한 문제는 그가 이런 실수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대통령이 자기 나라 말의 어법을 제대로 지키는지는 우리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데 국제관계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라면 어떨까.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조정 문제를 언급하면서 '파키스탄인(pakistanis)'을 '파키스(pakis)'라고 표현해 파키스탄의 분노를 샀다.

pakis는 일본인의 경멸어인 japs, 흑인의 경멸어인 negroes처럼 '파키스탄 자식들'이란 뜻이다. 부시 대통령은 유럽방문 때 파리 엘리제궁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그가 한꺼번에 쏟아진 질문들을 기억하지 못하자 시차를 탓하면서 "나이 쉰다섯살이면 다 이렇게 된다"고 했을 때, 옆에 있던 예순아홉살의 시라크 대통령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고 미국 언론들은 묘사했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독일과 프랑스를 싸잡아 '늙은 유럽(old Europe)'이라고 비하하자, 위르겐 하버마스.자크 데리다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나서서 그의 발언이 무지와 오만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난했다.

부시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실제보다 더 공격적으로 비쳐지는 것은 초보적인 언어 예의에 무신경한 그들의 말습관에도 원인이 있다. 참모들이 부시 대통령의 영향을 받는 건지, 부시 대통령이 그들의 영향을 받는 건지 궁금하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 <chuny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