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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의 미래상을 탐구하는 67년의 캠페인|예술의 지방성과 국제성 - 백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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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예술의 지방성과 국제성-. 오늘의 예술론을 위하여 지방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견 지나간 날의 화제라는 느낌이 든다. 지금 무대위에선 「재즈」음악과 「트위스트」춤이 한창인데 그 무대 위에「지방성」을 등장시키는 것은 시골뜨기의 연설을 듣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필요해서 이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지만 선진한 세계예술의 현상과 방향에선 일종의 「아우트 오브 데이트」한 화제같이 들리는 것이다.

<문화 교류의 시대>
오늘은 한마디로 해서 문화교류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류는 문화·예술의 특수성·지방성을 경쟁하기 보다 일반성·세계성을 지향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현대의 비교학도 특수한 영향성의 「데이터」를 다루기 보다 세계학의 수립을 목표하고 있다.
문학론에서도 근대(19세기)의 문학은 특수성·민족성의 것이었다면 현대 문학은 세계성·인류성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논하고 있다.
작품성에 볼 때에도 현대 예술은 내면성의 문학에서 추상예술에 이르기까지 특수한 것이나 현상을 추구하기 보다 내부와 본질의 세계를 표현한다. 지금 「파리」의 조형예술계에선 「보프」(BOP)니 「호프」(HOP)니 하는 예술이 대유행을 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어디서 소생 한 것인지 조차 묻지도 않고 물을 필요도 없이 그저 유행되고 있다.
현대는 좋다고 보면 누구의 것이든지 가져다가 쓰면 된다. 이것이 현대 문화교류 시대의 「큰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교류 시대에 있어서 한국만이 독립해서 예술을 할 수는 없다. 교류가 현대 예술계의 대세라면 한국도 그것을 막는 것이 아니고 그 세력에 편승해서 자기를 풍부하게 살릴 도리를 차려야 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진출해 가는 교류적인 일이 필요하리라. 그런데 우리 경우에는 그 교류의 실제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지방성의 화제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개화기 시대의 신문화 운동을 반성한다. 현대의 세계 예술의 일선에서 일보 후퇴해서 전략을 세우는 뜻이 된다. 오늘의 한국은 지역이나 시간에 있어서 다 「유럽」이 아니고 한국인 때문에 근대화가 새삼스럽게 문제되는 이유가 있다. 근대화는 우선 근대화이지 곧 현대화는 아니니 말이다. 여하튼 한국의 경우에선 곧장 「유럽」식으로 현대화로 직행할 수가 없어서 한번 후퇴하여 지방성 위에 서 보는 것이 크게 방법론의 의미를 띠게 된다.
이것은 물론 교류성, 현대화의 과제를 도외시하는 일방적인 행위가 될 수는 없고 말하자면 더 구체적으로 한국의 현실성에 즉하여 그 과제들을 동시에 진취하는 결과를 노리는 점이다. 차라리 수용은 비판적으로 진출은 창조적인 것으로… 하는 말과 통하는 길일 것이다.
「지방성」을 「로컬리티」로 번역해서 「웨브스터」를 보면 「지방적인 것의 사실과 상태」 「지방적인 모상과 특이성」, 다시 「로컬」을 보면 「특수한 지역의 성격적인 것... 일반성이 아닌 것... 예를 들면 지방적인 「아이디어」를 소유한 사람, 지방적인 입장의 사고방식」 그리고 「로컬·컬러」에는 작품의 경우 「특수한 지방성과 그 주민의 모상, 특이성을 표현한 것에서 생겨진 것...」등으로 주석이 나와 있다.

<고유성과 역사적 조건>
「지방성」을 다른 말로 「향토성」이라고 바꿀 수 있다. 「향토성」이란 「도시성」과 대립되는 말로서 혼합된 것이 아니고 더 고유성, 또는 순수성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이런 뜻들을 다 참고해서 「지방성」을 생각하면 우선 그것은 자연·풍토가 예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문제이다. 19세기의 문학·예술의 이론은 특히 이 풍토에 「액센트」를 두었다. 풍토와 예술의 떠날 수 없는 관계는 지리와 기후와 식물과의 관계와 유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의 기본성격에 대하여 남구 적인 것, 북구 적인 것을 대조해서 말했다. 미국의 현대 문학에서도 특히 남부문학, 서부활극이라고 할 때에 자연 풍토의 「컬러」가 짙은 것이다. 예술 작품과 지방성의 문제는 외면적으로는 우선 소재의 여건에서이다. 한국을 위시한 동양의 고대 예술은 특히 자연을 「모델」로 삼았다. 시문학을 「풍월」이라고 할만큼. 풍월이란 작품 양식의 의미까지 연장되었다. 조형예술에 있어선 선(감)이 「유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붕·탑·항아리 등에 표현된 유아한 곡선, 원주의 일부분... 이것은 한국의 자연, 저 구릉의 유원한 선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동양학를 산수화라고 하는 것도 풍월의 경우와 같다. 요는 자연풍토가 한국예술의 소재와 형식성에 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한국예술의 지방성이요 향토성이요 전통성이기까지하다. 한국 예술의 국제 진출에는 이런 뜻으로서의 지방성이 극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지방성」은 둘째로 그 지방의 주민의 생활양식·사고방식의 반영물이다. 한마디로 해서 지방성은 역사적인 생성물이다. 위에 말한 자연환경과 그 주민의 생산양식의 관계과정에서 또는 정치사의 관계, 문화 예술의 외국영향의 관계까지를 넣어서 예술은 구체적으로는 지역인의 역사 생활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고 또 그 역사 생활의 반영인 만큼 예술작품에는 필연적으로 특수 특이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국의 시가 민요가 대표적으로 「엘리지」가 된 것, 음악의 단조로운 애조적인 선율 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문학작품에는 그 역사조건에 대한 더 고도한 특질의 반영도 볼 수 있다. 해학이라고 하는 「유머」 그것은 한자로 쓰고 있지만 대륙의 것과 엄연히 구별되는 것. 언어적인 수사법에도 과장에 의한「리얼리티」, 이런 것들은 여하튼 우리 과거 예술작품의 「패턴」이라 할까, 「아키타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유머」의 문제만 해도 오래 내버려두고 현대문학이나 희곡에서 발굴하여 쓰지 못하고 있다. 근래 연극에서 신파 비극에 대하여 새로운 희극운동의 기운이 일고 있는 것은 경하할 일이지만 그 「코미디」는 더 서구적인 것인데 이 기회에 우리들의 해학적인 특이한 「유머」를 더 현대 희극화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본다. 끝으로 지방성은 동시에 역사적으로 현시점의 현실성에서 강조되는 뜻이 크다고 봐야겠다.
한국은 일본 등을 제외한 태반의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치적인 실지를 회복하고 신흥 성장하는 나라들, 이런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예술의 특성은 정치성을 띠고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점이다. 지방성을 특히 강조하게 된다. 인도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 종래에 쓰던 세계어이든 영·불어를 버리고 새로 지방어를 강조하는 경우와 같다. 한국은 다행히 36년간의 식민지 생활 속에서도 민족어를 지켜온 자랑을 할 수 있으나 이 기회에 자기의 것, 민족적인 것, 지방적인 것을 내세우고 나서는 것은 동일한 현실성 위에 서 있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내세우는 지방성은 우선 그 지역의 것이며 특수한 것이며 비세계성·비보편성의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이것을 어떻게 국제성의 광장으로 끌고 나갈 것인가. 그 길을 어떻게 통하는가가 동시에 제기되는 문제이다.

<민족적 전통의 탐구>
지방성-이라고 해서 외견상의 특이성만 생각하여 국제성·세계성과 상반 모순된 성질로 .볼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방성이라 할 때에 그것은 벌써 소박한 의미의 자연·풍토의 것이 아니고 일종의 개성적인 것으로 보면 그 지방성이 결코 혼자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대로세계문화·예술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냐하면 세계문화란 민족문화의 합성이기 때문에 민족문화를 떠난 세계문화란 실상 공허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은 특수성 또는 개성을 통해서 보편성 내지 전형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계성으로 통하는 길은 먼저 민족적 전통의 탐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민족적 전통이란 결국 하나의 개성이다. 그리고 훌륭한 예술가는 그 자신이 민족적 지성과 대등한 하나의 개성일 수 있다.
그는 사회집단으로선 한 민족에 속해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인류에 속해 있어서 그 민족의 특수한 개인성과는 다른 거기서 벗어난 개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개성적인 것으로서의 지방성과 보편성으로서의 세계성과는 서로 「오벌업」이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하나는 문학예술이란, 다 정말 인간적인 것, 「휴머니티」의 진실을 추구하고 표현하는 것인데 그 「휴머니티」의 본질이란 지방성을 뛰어 넘어서 서로 진실을 통하고 있는 공동광장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의 주제와 표현이 그 「휴머니티」의 본질에 도달할 때에 그것은 곧 세계성에 도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지드」의 말이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유력한 말이 된다고 본다.
가장 인간적인 작품, 가장 일반적인 흥미를 끄는 작품은 또한 동시에 가장 특수한 것이다. 한 민족의 천재가 한 개인의 천재를 통하여 가장 특별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아이스큘로스」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이상으로 국민적인 것이 누구인가.
그 이상으로 일반적인 인간이란 무엇이냐, 또 그 이상으로 개인적인 것이 무엇인가- 결국 그 세 가지의 용어는 서로 중복되어 있으며 어떠한 예술작품도 먼저 국민적인 의의가 없이 보편적인 의의를 가질 수 없으며 또 개인적인 의의 없이 국민적인 의의를 가질 수 없다는 사정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헷벨」의 말 『개인주의란 한 목적임보다도 한 과정이다」고. 다음으로 『내용은 지방적인 것, 형식은 세계적인 것 』이라는 이론이다. 결국 예술작품은 두개의 내외 조건으로 성립한다. 지방적인 것에 대한 예술가의 인식 내용과 그것의 형식화. 형식화는 곧 보편화라 보면 예술작품이 세계적으로 전달되는 매개는 그 형식이다. 지방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철저할수록 자연 발생적으로 형식화의 세력이 생긴다.
그러나 더 높은 예술가의 제작 행동은 자기가 하고 있는 예술 형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갖고 내용성을 조절하는 데서 두 개의 조건의 조화를 이룩한다. 이성에 의하여 억제된 정열, 강력한 균형을 이룩하는 일이다. 이런 고도한 예술 형식의 세계란 곧 세계 예술의 공동 세계이다. 이 세계를 지향하고 한국 예술은 고개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거점이 되는 것은 개성적인 것이요 전통적인 것이다.

<의식적인 자기탈피를>
위의 조건들에 의하여 우리는 한국예술의 세계진출의 길을 본다. 그렇게 지방성과 개성을 거점으로 한다는 것은 국제교류나 외래성에 대하여 길을 막는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영향들에 대하여 이쪽이 선택권을 행사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이쪽의 지방성도 그대로 지역 속에 남지 않고 참된 국제 교류 속에서 세계성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한국의 지나간 예술운동이 범한 오류를 자기 비판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특권을 충분하게 행사 못 하고 선행한 남의 영양 섭취를 안이한 「이미테이션」으로 대치했다는 결론이 된다. 선행한 외국 예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잘못이 아니고 그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 못하고 겉으로 따라간 지식의 빈곤과 동시에 자기나라의 전통을 늘 의식하지 못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고대 예술 특히 문학에 있어선 지리적인 조건 또한 원인 규명이 된다. 지역적으로 중간 지역인 관계로 해서 대륙의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매개적인 일을 했을 뿐이지 외국 예술을 충분히 우리 지방성 위에 정착시키고 소화해서 내외의 조건을 유기적으로 결합·완성시키는 일을 못한 이유가 있다. 그런 표면성·모방성은 우리 예술 운동의 한 타성이 되었는데 특히 비판 대상으로 돼야 할 곳은 개화기 이후 신문화 운동기이다.
이 때는 근대성의 문화·예술이 들어온 시기, 이 때야말로 지방성 전통의 문제가 의식되어 작품 실천을 올바르게 할 시기에 있어서, 역시 안일하게, 과거의 타성을 타고 표면을 전진했다. 근년에 와서 근대화의 제목을 갖고 자주 과거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는데 있어서 우선 지난 반세기 동안의 신문화 운동이 주 대상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동시에 ,현재의 한국 예술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인 경우엔 언어의 장벽 문제도 있어서 밖에 소개하는 일 자체가 어렵지만 간혹 번역이 잘 되어 나가도 외국에서 그것을 특이하게 보지 않고 그들의 아류로 보는 평이 나오는 것은 우리가 개성적인 것을 충분히 거점으로 쓰지 못한데 치명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음악계만 해도 가끔 천재의 이름으로써 외국에서 연주한 호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연주란 결국 서양 음악을 습득한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또 연주의 경우에도 저쪽에선 악기를 「콘서트」를 하고 있는데 이쪽에선 그 악기에 「콘서트」되기가 쉽다. 더 문제되는 것은 작품인데 그 점은 아직 빈곤하다.
교향곡으로는 66년도에 발표된 나운영의 작품 4, 5, 6이 있는 정도, 그리고 현재 독일에 나가 있는 윤이상, 다아는 경지가 남에게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동양학의 경우도 일본화와 대조해서 한국의 동양화를 보면 그 특징이 모호해지는 것을 느낀다. 대체로 현대 한국예술계의 현상은 국적이 분명하지 못한 작품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연극 특히 영화는 아직 초보적인 「이미테이션」영역도 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예술이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운 장래에 선진 국가와의 국제적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5개년 계획과 같은 작품제작 목표를 세우고 한국을 증명하는 의식적인 작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자기탈피 할 조건이 많이 전제되어 있다.

<지방성의 대지 위에>
금후 한국 예술의 국제적 진출의 문제는 「테크닉」에 앞서서 작품 제작에 임하는 의식 의욕의 문제라고 알 수 있다. 말을 바꾸면 그 주체성의 의식을 강화하는 이야기가 된다. 또 말을 바꾸면 우리 한국 예술가는 타고난 재능도 있고 그만큼 과거를 발굴하면 전통을 찾을 수도 있는데도 우리는 오랫동안의 정치적·문화적인 침략 억압에서 습관이 든 그 사대성의 자기 비하의 정신태도, 이런 것들이 우리 창작의 대담한 비약을 크게 방해하고 있다. 먼저 그 정신적 인습을 타파해야겠다.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것, 우리는 도저히 저쪽과 경쟁할 수 없다는, 아류의 정신을 극복하는 그런 파겁의 주체의식 확립의 정신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현상 타파를 위한 근본 방법의 하나는 우리 교육 이념과 제도를 일신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현재 여기엔 음악학교가 많지만 그것들은 혹평을 하면 외국 음악학교의 출장소 격 밖에 못된다. 아니. 출장소 자격도 충분하지 못하다. 제도도 남의 것, 이념도 아류적인 것, 이래서는 정말 우리를 위한 예술 교육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분야의 교육도 마찬가지인 줄 안다. 더 창의자인 교육이 대담하게 시행돼야 할 것이다. 교육 문제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문학 예술의 장래를 더 많이 젊은 세대에 기대하는 점이다. 아무래도 기성 세대의 예술가에겐 예전부터 젖어 온 비하 정신이 한 「콤플렉스」처럼 되어서 좀처럼 그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젊은 세대는 더 대담하게 자기 재능을 힘껏 발휘 할 수 있다.
그리나 기성인들도 그저 자기재능과 입장을 포기 할 순 없다. 어떤 현실 계기에서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 좌중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나왔다. 현재 월남파병의 문제는 역사가로서 평가가 있겠지만, 우리 문학·예술 운동에서는 우리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역증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인은 예술의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이며 문화·예술의 국민으로서 자인 장담하고 있다면 그 장담이 담장 안의 호언이 아니고 세계적인 증명을 시킬 시대를 의욕 해야 되겠다. 나가서 현대 예술은 구제적으로는 고도한 「테크닉」의 과학적 훈련이다.
엄격한 훈련과 끊임없는 근면 노력이 필수 조건이라면 대체로 우리 예술가들의 작품태도는 「이지」한 것이 병이다. 뒤떨어진 우리 예술이 남을 따르고 넘어서기 위해선 두 배의 힘을 들여야 할 터인데, 다방 전문가의 인상까지 드는 안이한 병풍을 시급히 극복해야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입장은 지방성의 대지 위에 세우고 시야는 어디까지나 세계에의 진출, 그것을 위하여 이론 실제의 양면에서 오늘은 우리의 반성기요 동시에 전진의 시대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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