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굴렘 만화제서 만난 슈피겔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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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진지함과 작품성을 설명할 때 흔히 예로 드는 것이 '쥐'라는 작품이다. 나치 치하에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겪은 주인공을 통해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얼마나 절망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쥐.고양이.돼지.개구리 등 동물의 모습을 빌려 그려낸 수작이다.

1986년과 92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작품은 만화로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92년)을 받았으며, 국내에서도 94년 번역돼 나왔다. 프랑스의 중학교에서는 2차 대전을 이해하는 부교재로 사용될 정도다.

지난 25일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참석한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55)의 회견장에 각국 기자들이 몰린 것은 그래서 별로 이상할 게 없었다. 계단까지 자리를 메운 행사장에서 그는 시종일관 담배를 손에서 떼지 않고 빠른 말투로 자신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그가 현재 그리고 있는 작품은 '사라진 탑의 그늘에서(In the Shadow of No Towers)'. 9.11 테러를 다룬 것이다. 지난해 9월부터 프랑스 시사주간지인 쿠리에 앵테르나쇼날을 비롯해 뉴요커.로스앤젤레스 위클리 등에 연재되고 있다.

"만화가는 역사의 목격자라고 생각합니다. 9.11과 관련된 모든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었지요. 사건 당시 이를 한 장으로 그리긴 했지만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서부터입니다."

자전적 만화인 '쥐'에서도 잘 보여주었듯,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쟁의 참상을 들어온 그로서는 9.11 사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미국은 '오일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국제문제는 대화로 해결이 가능한 법"이라는 게 그가 이 만화에서 하고 싶은 주장이다.

그의 만화는 간결하지만 깊이가 있다.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수년간 조사하고, 수백장의 배경을 그리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이른바 '심플 앤 클리어'다. 이 원칙은 새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쥐'가 굵은 펜선의 흑백작품이라면 새 작품에서는 사진이나 일러스트같은 이미지를 활용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만화의 힘을 재삼 강조했다. "만화는 순수한 저널리즘입니다. 일간지 기사는 24시간용이지만 만화는 그보다 수명이 길지 않습니까"라고 강조한 그는 만화를 이해하는 어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만화의 미래를 밝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앙굴렘=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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