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대표하는 생물은 박테리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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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박테리아보다 못하다니.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 생물에서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가 진화하고 마침내 인간과 같은 고등생물이 나왔다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화란 곧 진보가 아니던가.

하지만 정작 자연선택이론에 의한 적응과 변이를 강조했던 다윈의『종의 기원』초판에는 ‘진화’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윈은 환경의 변화에 따른 국소적인 적응만을 얘기했을 뿐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은 편협한 인간 중심주의와 진화론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어우러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풀하우스』(이명희 옮김, 사이언스 북스)는 바로 이런 상식화된 믿음에 도전한다. 저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현대 진화생물학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다윈 정신의 회복을 외친다. 그는 자연과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생물학과 지질학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뤘으며, 특히 대중적인 글쓰기로 상당수의 베스트셀러를 갖고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에는 『판다의 엄지』 (김동광 옮김, 세종서적),『다윈 이후』(홍동선 외 옮김, 범양사출판부),『새로운 천년에 대한 질문』(김종갑 옮김, 생각의 나무) 등이 있다. 진화론에 관한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진화는 진보가 아니며 사다리 오르기가 아니라 가지가 갈라지는 과정이며, 우연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굴드는 이 책에서 특히, 평균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야구의 진화, 생명의 진화, 문화의 진화에 적용시키면서 우리의 그릇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꿀 것을 요구한다. 한 체계의 평균값으로 그 체계의 전반적 특성을 짐작하는 우리의 사고 습관을 완전히 버려야 체계 내 다양성의 가치가 눈에 들어오고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진화 현상을 거시적으로 통찰하는 굴드는 환원주의적 과학 연구방법론에 반하여 종합론적, 유기체적, 시스템적, 전일론(holism)적 사고를 강조하는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 흐름을 수용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유력한 예로 설명하고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4할 타자 전멸에 관한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 1941년 테드 윌리암스의 4할 6리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는 더 이상 4할 타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왜 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현대의 선수들이 그 당시 선수보다 기술이 떨어진다거나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설명에서부터 타력에 비해 투수력과 수비력이 향상되었다는 그럴 듯한 설명까지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굴드는 이런 설명이 4할 타자를 야구라는 시스템 전체의 향상과 관련지어 설명하지 못하고 독립된 실체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타자들의 실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메이저리그 전체의 경기력이 향상된 결과라는 것이다.

즉, 시스템 전체가 향상되면서 변이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4할 타율은 '어떤 것'이 아니라 타율의 변이값들로 이루어진 풀하우스의 오른쪽 꼬리일 뿐이다. 경기의 일반적인 향상으로 변이가 줄어든 결과, 즉 경기가 계속 세련되어져 간 결과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굴드는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는 것,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를 설명하려는 오류를 비판한다. 이런 오류는 진화론과 야구뿐만 아니라 공연 예술과 창작 예술, 과학 등 변화해 가는 모든 체계 속에 공통적으로 숨겨져 있다. 굴드는 이것을 플라톤적 사고 방식이라고 부르며 이를 다윈적 사고 방식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플라톤적 전략은 전체를 하나의 추상적인 숫자로 환원하고 시간에 따라 이 숫자의 변화를 추적해 가는 방식이며, 평균을 원형으로 해석하거나 사람들에게 경이감(야구의 4할 타자)이나 공포감을 주기 위해 극단적인 예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36쪽)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굴드에 의하면, 지구를 대표하는 생명체는 생명의 가지에서 정말 우연적 요소에 의해 생겨난 곁가지에 불과한 인간이 아니라, 최빈값(가장 흔한 값)을 가지는 박테리아다.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의 자연과 생물에 대한 인간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한다.

진화는 직선적 과정이 아니다. 진화는 일직선의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인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을 읽는 데 대단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수학에 나오는 정규분포곡선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생명과 진화에 대한 관심이면 충분하다.

(박정철/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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