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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학교 모습·교과서·수업 장면 등 천안교육의 역사 고스란히 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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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지역 교육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 탄생했다. 천안교육지원청이 전국 지역 교육청에서는 처음으로 지역 교육역사를 담은 기록관 홈페이지를 꾸며 주민들에게 공개했다. 천안교육사를 비롯해 각종 교육 관련 자료를 검색할 수 있고 다양한 기록물을 주민들이 직접 찾아 볼 수 있다. 역대 교육장과 옛 학교 모습, 교과서, 수업·졸업 장면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 난다. 천안교육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 봤다.

강태우 기자

근대 이전의 천안 교육

성균관의 규모를 모방해 각 고을마다 설치한 교육기관이 향교다. 향교는 지방 교육기관의 대표적인 역할을 했다. 각 고을이었던 부·목·군·현에 각각 1개씩 있었다. 천안지역에는 천안군·직산현·목천현이 존재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현명한 사람을 뽑아 제사를 드리기 위한 선현제향을 위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기구였다. 조선의 서원은 유학자들의 장수처(藏修處)이자 동시에 향촌사림의 취회소(娶會所)로서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원은 흔히 서재(書齋), 사우(祠宇) 등과 혼칭되고 성격도 비슷했다. 천안에 있었던 서원으로는 목천의 도동서원과 천안의 육현사가 존재했다.

 이밖에 천안지역에는 유명한 서당이 많았다. 서원말의 죽림강사(竹林講師), 울바위의 검계서당(儉溪書堂), 만마루의 만화당(萬花堂), 새터말의 청류강사(淸流講師), 매봉 아래 영회당(英會堂), 한저루의 흥교암(興敎庵), 잣밭의 도정강사(桃汀講師), 화산의 사교당(四敎堂), 은석산의 은산시사(銀山詩社), 흑성산의 승천시사(昇天時社)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이 나라 안의 영재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한 영회당(英會堂)과 전국 선비들이 모여 시문(詩文)을 경쟁한 승천시사(昇天時社), 국내 문장 대가들이 모여 시문을 서로 주고 받아 책을 이룬 은산시사(銀山詩社)다.

근대의 천안교육

충남은 지역적 조건과 더불어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근대 학교 설립이 비교적 늦었다. 지역적으로 개화 매체인 기독교의 전도가 시작된 서북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 대교·석학이 많이 배출돼 유교적 전통에 대한 일반 주민의 수구적 사고경향이 어느 지방보다 강한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유교 교육이 개화 이후에도 계속됐고 근대적 의미의 학교 교육은 대체로 20세기 들어서야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화기 때 천안교육은 우리나라 학부 방침(1895년 7월 19일)에 따라 한성부와 관찰부 소재지에 관·공립 소학교를 설치하고 일부 지역에 공립학교를 설치하면서 지방관 주도 아래 사립학교를 설립하도록 권장했었다. 민족교육에 바탕을 두고 설립됐고 사립학교에도 일부 재정을 지원했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설립된 사립 소학교를 공립학교로 흡수, 민족교육의 공교육 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일제는 한반도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1906년 8월 보통교령을 발표하고 기존의 관·공립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편하면서 사립학교의 재정 지원을 없애고 감시를 강화했다. 당시 천안지역 사립학교와 공립학교로 전환된 사립학교는 목천의 홍호, 병천의 진영, 수신의 장명학교 등 17개 학교가 있었고 60~70개의 서당이 자리했다. 기존의 민족계 사학은 대체로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됐고 이를 계기로 많은 공립보통학교가 신설됐는데 현재의 천안초등학교인 영진학교와 경위(직산초)·보명(목천초) 학교가 사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전환된 사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보통학교의 1면 1교 계획으로 초등교육 확충을 도모했고 국민적으로 3·1운동을 겪은 뒤 오랫동안 눌려 있었던 민족의식을 다시 회복하고 학문을 갈구하는 정열이 높았다. 반면 중등교육에서는 다소 미미했다. 일제강점기 천안지역 학교는 직산초(1901년)·천안초(1911년)·목천초(1913년)·성환초(1921년)·천동초(1922년)·광덕초(1923년)·은석초(1924년)·성남초(1925년)·입장초(1928년)·병천초(1929년)·풍세초(1932년)·환성초(1934년)·성거초(1936년)·수신초(1938년)·보산원초(1939년)·남산초(1944년)가 있었다. 중등학교로는 실업계로 천안공립농잠보습학교(현 천안제일고)가 있었다.

당시의 목천학교과 입장광명학교의 학생만세운동은 천안지역 학생들의 기상을 보여주기는 계기가 됐다. 이후 1940년대는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수준의 교육이념과 교육방침이 설정됐고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이 공포돼 교육의 방향과 진로가 확립됐다. 교육목적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격을 완성시키고 민주생활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간 양성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 천안지역에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12개와 천안공업중학교가 개교했다.

1950년대는 6.25전쟁 후 국민학교 및 중·고등 교과과정이 문교부령으로 공포되면서 교과 중심 교육과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간이학교와 분교장 등이 초등학교로 승격됐고 사립 중·고등학교와 여자중·고등학교가 개교했다.

1960년대는 교육혁신운동 4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교원의 자질을 향상시켜 교권을 확립하기 위한 교직연수에 역점을 뒀고, 1970년대는 새마을 교육으로 향토발전에 기여하는 유능한 향토인을 기르는 데 주력했으며 새마을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신계초(1974년), 목천초(1976년), 천안북중(1978년)이 전국 새마을교육 우수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초·중학교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대책을 수립, 과학 및 시청각 기자재 구입비를 지원하는 등 자재를 대폭 확충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남산초와 직산초가 과학기술처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밖에 1990년대에는 진로 선택의 기초적 자질교육을 위한 교육발전협의회와 과학교육을 집중적으로 운영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천안 독서 골든벨, 기초과학 교육 충실, 중기발전계획 수립·추진, 천안지역 문화운동 확산과 지덕체를 겸비한 인재 육성을 위해 독서·봉사·걷기 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덕전분교(1991년), 장송·화덕분교(1992년), 덕성·송정분교(1993년), 천북분교(2000년), 봉성분교(2007년)와 아우내중학교(2005년)가 폐교됐다. 천안은 1994년부터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해 2013년 현재 유·초·중·고 학생수는 232개 학교에 9만9217명에 이른다.

김현기 천안교육지원청 기록관장은 “과거와 오늘을 교훈 삼아 천안교육의 밝은 내일을 그리기 위해 기록관 홈페이지를 개통하게 됐다”며 “앞으로 기록관 홈페이지를 통해 참여와 소통의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교육청과 학교역사 기록물의 체계적인 수집·발굴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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