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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10화(3) - 이해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극작가가 대본에 써놓은 말도 배우가 그 말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죽은 말이 되는 거와 같이 무대에 세워진 장치와 소품도 배우의 손이 가지 않으면 죽은 것이 된다. 배우가 등장하기 전의 장치는 말할 수 없이 허전하고 배우가 사용하지 않는 「테이블」과 의자와 꽃병은 또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극작·연출·장치·소품 등은 배우를 통하여서만 관객과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무대에서는 말할 수 없이 위대하게 보인 배우도, 화장을 짓고 현실에 나오면 환멸을 느낄 정도로 초라하여 무대에서 본 그의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 젊었을 때 나는 몹시 몸이 말랐었는데 배역은 언제나 건장하고 비대한 것만을 맡았다. 그래서 소위 「살」이라는 것을 넣느라고 두꺼운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무대에 나갔다. 나의 무대만을 본 사람은 내가 마른것을 몰랐다. 그때 어느 술집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한 술친구가 한참동안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대뜸 『네가 이해랑이냐?』하고 낄낄거리고 반말 지꺼리를 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관객은 곧잘 무대의 인물과 배우를 동일한 「이미지」로 착각을 4하지만 현실의 배우는 그 반대일 경우가 많다.
어떤 배우가 친구 결혼식에서 그전에 연극에서 해본 일이 있는 축사를 그대로 외었다. 처음에는 연기를 하듯 멋들어지게 축사를 엮어대었으나 그만 다음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그러나 그 식장에는 연극에서처럼 무대에서 배우가 말이 막히면 뒤에서 알려주는 「프롬프터」가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만 씻고 있던 그의 축사는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잘것없는 존재, 허영심과 증오에 찬 질투심은 여느 사람 몇 배 크고 걸핏하면 이혼을 잘하는 것이 현실의 배우다..
생각하면 배우처럼 어리석은 존재는 없다. 하느님이 주신 얼굴에 또 하나의 얼굴을 만들기 위하여 남을 모방하고 남의 흉내를 내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자신의 비극을 안고도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하여 무대에서는 우스운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릿광대가 배우인 것이다.
그들은 가끔 인기가 정점에 달하였을 때는 잠재의식 적으로 그 인물에 동화되어 자신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곧 또 망아적인 경지에서 깨어나서 자신을 도로 찾는다.
만일 배우가 자신을 잇고 그 인물에서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일관하여 그 인물에 완전히 동화한다면 그는 단 한번밖에 명연기를 하지 못할 것이다. 「햄릿」에 분장한 배우가 연극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햄릿」으로 행세를 한다면 그는 정신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배우는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존재인 것이다. 성격이란 등장인물의 가면을 쓰고 그 밑에서 자신의 감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숨어서 해몽을 하고있기 때문에 무엇이고 그 인물이 할 수 있는 행동을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규방에서도 감히 하지 못 할 부끄러운 짓을 대중 앞에서 태연히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교양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가면의 밑에서 그들이 대담하여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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