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춘「중앙 문예」시 당선작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오탁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무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봉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무가지 위에 내려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문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순금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
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
지난밤에 들리던 석탄의 변성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나라 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불씨,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속으로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불씨, 불씨를 분다.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 가는 불씨를 분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