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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자갈길을 더듬어 이십오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끼륵 끼륵 새가 난다.
논두렁을 10리쯤 가면 계곡으로 접어드는 자갈길 이다. 산은 점점 깊어진다.
용인발 안성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이동면 「막터」에서 내린다. 여기서 「미리내」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까지는 25리가 실하다. 발부리에 돌맹이가 채는 자갈길 너머로 하얀 청탑이 보인다. 길은 여전히 험하고 멀었다.
15세 댕기머리 소년들이 꽁꽁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널때도 길은 멀고 험했다. 1836년12월, 그들의 배행길은 더춥고, 험란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소년들은 단숨에 몇백리를 걷고, 밤새에 산을넘고, 또 강도 건넜다. 그들에겐 무서운 정기가 있었다. 고통에 찌들어 쉽게 연민(연민) 하는 범속한 소년형은 아니었다.
한국에 교회가 창설된지 (1785년 서울교회) 반백년이 지나드록 한국인 성직자는 한사람도없었다.
한국어에도, 토속에도, 인정에도 어두운 외방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한다고 우왕좌왕하는 현실이었다.
한반도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불국 선교사나 백다녹(베드로·모방) 신부는 다행히도 이런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최민업·최방제·김대건등 세 소년을 뽑아서 중국 「마카오」로 신학공부를 떠나 보낸 것이다. 배평·천진·남경·복주·광동을 거쳐 거의 7개윌이나 걸려 그들은 중국 만리를 답사했다.
쌍룡산 계곡에 접어 들자 어디서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참나무가 자윽한 숲을 넘는 바람소리-.
성당마당에선 젊은 사제 한분이 아이들 몸에 어을려 노래를 부르고있다. 이 한촌에 찾아온 「크리스마스」는 현란한 장식도, 호화스러운 흥취도 아닌 아이들의 소박한 노래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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