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좋아? 코끼리처럼 느려 터져도 지금이 좋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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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Elephant)
포유류 장비목(長鼻目) 코끼리과 동물의 총칭. 육상 최대의 동물. 목은 짧고 큰 몸을 지탱하기 위해 네 다리는 굵다. 평생의 시간을 미리 회사에다 팔아 넘기고 그 대신 평생 고용을 보장받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일컫기도 한다.

안정된 수입, 편리한 납세 절차, 회사 내 신분에 따른 사회 내 신분 표시 등 좋은 것들을 제공하지만 이 무리 속에 오래 있다보면 그 굵은 다리처럼 움직임이 굼떠지고 안전한 생활에 안주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벼룩(Flea)
벼룩목[隱翅目] 벼룩과의 곤충. 뒷다리는 도약하는 데 적합하며 등면에는 특수한 감각기가 있다. 20세기 고용문화의 큰 기둥이었던 대기업, 즉 코끼리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혼자 힘으로 생존하는 프리랜서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내팽개치고 새롭고 무모한 모험의 세계를 선택한 부류들.

명함 속에다 이름 외에는 쓸 게 없지만 또 그래서 더욱 자유로움을 느끼는 사람들. 『헝그리 정신』(노혜숙 옮김, 생각의 나무),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김진준 옮김, 생각의 나무), 『코끼리와 벼룩』(이종인 옮김, 생각의 나무) 등을 집필한 찰스 핸디가 이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벼룩의 삶은 포트폴리오 인생
두 용어를 사전처럼 놓고 보니 확실히 차이가 크긴 크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이자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인 찰스 핸디는 신작 『코끼리와 벼룩』에서 거대기업과 프리랜서를 코끼리와 벼룩으로 비유한다. 그는 프리랜서가 되던 1981년, 자신의 인생을 ‘포트폴리오 인생’이라 부르며 “20세기 말이 되면 포트폴리오 인생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가 프리랜서가 된 데는 아내의 예리한 질문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여보,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랑스러우세요?”어느 날 저녁 아내가 물었다.
“좋아, 그런대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특별한 사람들이에요?”
“좋아, 그런대로.”
“그럼 당신 회사는 좋은 일을 하는 좋은 회사인가요?”
“응, 그런대로.”
아내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좋아, 그런대로’의 태도를 가진 사람과 한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290쪽)

하지만 핸디처럼 자신의 잠재력을 100퍼센트 믿기란 힘든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독립선언을 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찰스 핸디 역시 무턱대고 ‘벼룩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왜 자신이 벼룩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학창 시절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나날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피학주의자이거나 아주 기억력이 나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고등학교 교정을 떠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아주 슬픈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 테니까.”(65쪽)

“나는 얼핏 내 과거를 돌아보았다. 영국 공립학교와 옥스포드 대학이라는 가장 좋은(혹은 가장 나쁜) 교육기관에서의 수업, 군대와 공무원을 혼합해 놓은 것 같은 다국적 기업 셀에서의 직장생활, 심지어 설립부터 내가 관여한 런던 경영대학원도 내 앞의 세계를 헤쳐나가는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어느 학교를 나와 어떤 직장에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으며 20세기 고용문화의 큰 기둥이었던 대기업은 더이상 직장인들의 희망이 되지 못한다. 코끼리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벼룩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인 ‘직장인들에 어떤 미래가 있는가’는 그러므로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반문인 것이다. ‘자, 코끼리처럼 그렇게 덩치 큰 너희들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지?’라고 묻는 것이다.

벼룩의 힘은 독창성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벼룩으로서의 삶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벼룩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 코끼리에 익숙했던 사람은 적지 않은 상실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아무런 소속도 없이 오로지 나 자신이 나를 대표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뒤따른다. 핸디는 이런 책임감 때문에 가정이나 교회, 자선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조심스런 전망도 해본다.

그리고 핸디는 벼룩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독창성’을 든다. 남들보다 뛰어나려 하지 말고 남들과 다른 독창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는 점은 『코끼리와 벼룩』만이 지닌 독자적인 매력이라 할 만하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평이 정확하다. “찰스 핸디의 글 쓰는 스타일은 개인적이며, 에피소드 위주이고, 전문용어는 단 한 단어도 없다.

하지만 그의 기준점은 다양하면서도 예측불허이다.”그리고 또 하나, ‘기업의 규모를 키우면서도 소기업적이고 개인적인 분위기를 보장하고 아이디어 소유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라’는 코끼리를 향한 충언도 담아 ‘죽도록 코끼리이고자 하는 코끼리’들에 대한 배려도 빠뜨리지 않았다.(김중혁 /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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