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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기업 해외매각] 4. 한보철강

중앙일보

입력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그로부터 만 5년이 흐른 오늘. 아직도 한보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한보는 한국기업 매각사(史)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물건을 팔면서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녹슨 당진공장 설비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보철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어느 누구 하나 책임지고 한보에 새 주인을 찾아줘야 겠다는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보는 2004년부터 빚의 원금을 갚아야 하므로 독자생존이 어려운 상황이다.

◇ 2조원에 팔 수 있었는데=한보철강 매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한보철강이 부도가 났던 그해 8월 포철.동국제강은 한보철강을 자산인수방식으로 인수하겠다며 2조원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일은행 등 채권단은 회계법인의 자산평가 등을 토대로 3조원이상은 받아야 한다며 거부했다. 당진공장을 세우는데 부지값(약3천억원)과 A지구(약 1조1천5백억원)와 B지구(3조4천여억원) 등 모두 4조9천여억원이 들었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당시 채권단은 시간이 흐를수록 물건 값은 깍인다는 진리를 간과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대금 납입조건 못 맞춰 실패=한보 채권을 자산관리공사(켐코)가 매입, 매각 주체가 된 2000년 5월. 4억8천만달러(약 6천억원)에 한보를 사겠다며 본계약을 체결했던 네이버스 컨소시엄의 아이젠버그 회장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경제부처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나 한보 운영과 정부 지원 방안 등을 의논하려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일정이 맞지 않아서였다. 그는 정부 최고위층으로는 산업자원부 차관을 만났다.

그는 포철 유상부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철강 공급이 전 세계적인 과잉인데 인수해서 이익을 남길 수 있겠느냐.

코렉스 설비는 우리도 없애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말 네이버스는 인수 대금을 납입하지 않았다. 이유는 대금납입 선행조건(조세채권 할인.설비공급자 동의 등)을 켐코측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협상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네이버스가 꼼짝없이 돈을 넣도록 하기 위해선 선행조건을 충족시켰어야 했으나 9월 중순까지 어느 누구도 뛰지 않았다"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파악한 재정경제부가 나섰지만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네이버스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내겠다고 했지만 이후에 국제소송은 생기지 않았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곳이 켐코였기 때문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당시 한보를 왜 빨리 팔아야하는지에 대한 정부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 초반부터 진통겪는 세번째 매각=켐코는 지난해 12월 한보의 조건부 낙찰자로 중후산업이 주축이 된 AK캐피탈을 선정했다.

켐코는 AK캐피탈을 선정하면서 입찰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매수가격은 입찰가의 상하 5% 이내에서만 조정이 가능하고▶매도자의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데도 계약체결이 안되면 보증금 1천만달러를 몰수하며▶계약 당시 자산가치는 매도자가 보증하지 못한다는 등의 세가지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AK캐피탈측은 매수가격 조정 폭을 상하 15%로 확대하자며 입찰보증금을 내지 않고 있다. AK캐피탈 관계자는 "가격은 깍아줄 수 없고 협상결과에 관계없이 보증금도 돌려주지 않으며, 파는 물건의 하자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켐코 안명호 부장은 "현대투신 매각 협상이 깨진 사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해각서를 맺는 단계에서 서로 꼼꼼히 조건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AK캐피탈로 선정됐을 때 올 2월에는 본계약 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나 초반부터 난항을 겪자 일부에서는 한보의 장래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동섭.허귀식 기자 donkim@joongang.co.kr>

*** 당진 한보철강 르포

서해대교를 지나 차로 20여분을 더 달려 도착한 한보철강 당진공장은 의외로 활기가 넘쳤다. 봉강공장 제강팀 김태년(31)씨는 "24시간 3교대로 철근을 생산해도 주문량을 소화하기가 빠듯하다"고 말했다. 한보 봉강공장은 정부의 학교증축 정책과 다세대 건물 신축 붐으로 철근 호황을 맞아 요즘 한껏 들떠 있다.

◇ 철근공장은 열기로 후끈=한보는 지난 11일 83억7천만원의 차입금을 갚았다. 이로써 부도 이후 은행서 빌린 돈(9백56억원) 가운데 4백75억원만 남았다.

나석환 사장은 "올해 경상이익 5백억원이상을 달성해 나머지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겠다"고 말했다. 한보는 지난해 부도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을 남겼다. 이에따라 회사측은 직원들에게 곧 성과급도 지급할 예정이다.

◇ 4개공장중 3개는 적막만 흘러=봉강공장을 제외한 나머지 공장 모습은 녹슬고 먼지가 앉은 채 을씨년스럽다. 한보 당진공장은 여의도 면적의 1.5배인 1백19만평 매립지 A,B지구에 4개 공장이 있다.

이 가운데 A지구의 봉강공장만 가동중이고, 나머지 열연공장은 수지가 맞지 않아 98년 설비가 멈췄다. B지구는 공정률 69%에서 공장 건설이 중단됐다.

전문가들은 한보가 B지구를 다 짓고 멈춰선 공장을 다시 돌리려면 추가로 1조8천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누가 인수해도 추가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또 A지구 열연공장도 세계적인 철강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떨어져 채산성을 맞추려면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열연강판은 가격이 t당 3백달러는 돼야 수지를 맞출 수 있으나, 현재 국제시세는 2백달러 안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진=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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