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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와 정겨운 풍경, 여기는 힐링필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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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유적을 뿌리로 감아 부수는 동시에 보호해온 나무들이 줄 서 있는 ‘따 프롬’은 파괴와 지탱, 애증의 사랑 변증법을 보여준다.

가깝지만 호젓하고, 저렴하지만 고급스러우며, 대중적이지만 나만 떠난 듯한 해외 여행지는 없을까. 자유롭게 살아가는 ‘싱글톤(독신자)’, 시간과 돈이 여유 있는 중장년층이 원하는 맞춤형 여행 프로그램이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이다. 여행 상품의 대세를 이루는 단체 관광과 차별화한 소규모 컨셉트(private concept) 관광이 한국 여행 시장의 새 흐름을 이루면서 여행사들의 아이디어 경쟁이 뜨겁다.

지난해 말 아시아 지역 11개 나라 32개 회원 호텔을 엮어 출범한 ‘시크릿 리트릿’이 내놓은 3박5일 앙코르 와트 여행이 그 대표 상품이다. 1000년 전 앙코르 유적으로 걸어 들어가 돌 사원과 그들을 휘감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향기가 여행자의 코를 간질인다.

씨엠립(캄보디아)=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비행기 트랩을 내리니 ‘훅’ 하고 더운 기운이 몸을 덮친다. 서울에서 5시간, 그럭저럭 견딜 만한 비행시간을 끝내니 겨울의 끝자락에서 한여름의 뙤약볕으로 순간 이동이다. 씨엠립 공항의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풍경은 앙코르가 지닌 유럽의 풍모를 살짝 내비친다.

‘시크릿 리트릿’의 캄보디아 체인인 ‘더 사마르 빌라 리조트’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대저택을 개조해 9개의 객실로 만들고 레스토랑을 곁들여 아담하면서도 정취가 깊다. ‘더 사마르(The Samar)’는 캄보디아 옛 이야기에 전해오는 연인들의 밀회 장소를 이르는 말로, 우리 식으로 치면 물레방앗간인데 이름 그대로 골목 안 깊숙이 돌아앉아 있다. 방을 정하자 대소쿠리에 담긴 천연 원료의 비누 세 종류를 내밀며 좋아하는 걸 고르란다. 세심한 배려의 향내가 향긋하다.

앙코르의 3박5일은 마지막 날 0시20분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오롯이 여행객 마음대로다. ‘더 사마르’에서 제안하는 추천 코스가 있지만 식당도, 유적지도 가는 사람이 정한다. 걸어 다니기에는 무덥고 먼지가 많아 주로 ‘뚝뚝(오토바이 뒤에 마차 형태의 좌석을 연결한 삼륜차)’를 타는데 느린 속도로 사방을 음미하며 달리는 맛이 매력 있다. 서울 시내에 ‘뚝뚝’이 도입되면 매일 타고 싶을 만큼.

앙코르 유적을 제대로 보려면 한이 없다. 새벽, 아침, 낮, 저녁, 석양, 한밤중, 시시각각 미묘하게 변하는 돌 사원의 영혼을 다 만나기는 애초에 글렀다. 빛과 그림자 속에 출몰하는 천 년 전 왕조의 목소리를 드문드문 들었을 뿐이다. 수만 가지 색을 지닌 돌무더기 한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과 어우러져 슬쩍 눈물이 흘렀다. 돌의 운명은 처절하게 아름다우면서 또한 징그럽게 슬펐다.

아시아의 영혼을 표현하는 호텔들의 모임 ‘시크릿 리트릿’의 캄보디아 체인 ‘더 사마르’.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 ‘당신의 나무’에 나오는 한 구절은 정글 속 신비의 유적인 ‘따 프롬’ 깊숙한 곳에 들어서서야 가슴을 쳤다. “거대한 석조 불상의 틈새에 뿌리를 밀어 넣어 수백 년간 서서히 바수어온” 나무는 동시에 진작 흙이 되었을 사원을 오늘까지 서 있게 한 힘이다. 돌 사원을 뿌리로 친친 감은 나무는 마치 연인을 옥죄는 애증의 상징처럼 보인다. 파괴와 지탱, 사랑의 변증법이 앙코르 와트에 오면 저절로 보인다. 손잡고 간 이가 연인이라면 미래의 사랑을, 중년 부부라면 과거의 사랑을 곱씹어 볼 수 있으리라.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소설에 나올 법한 순박한 얼굴의 가이드 조언을 받아 앙코르 와트 성소 왼쪽에 있는 연못에서 일출을 누렸다. 시나브로 붉은 물드는 하늘을 향해 터지던 수백 개의 플래시에 눈이 부셨다. 앙코르 최고의 일몰 포인트라는 ‘프롬 바켕’에서 장엄하게 지는 해를 좇았다. 앙코르의 보석이라는 ‘반띠에이 쓰레이’는 조각의 요설이었다. 남들이 재미없다고 별 점 하나를 매긴 ‘쁘레아 칸’이야말로 보석이라는 걸 발견했다. 정처 없이 돌들 사이를 헤매며 폐허에 말을 걸었던 시간의 조각들이 한동안 일상을 견디게 해줄 환기구가 될 것이다.

‘더 사마르’가 준비한 일정 중 재미있었던 건 현지 요리사가 진행하는 ‘쿠킹 클래스’다. 서울로 치면 동대문 시장쯤 되는 씨엠립 최대의 시장 ‘쌀 르’에 가서 캄보디아인들이 즐겨 먹는 식재료를 사고 다듬은 뒤 주방에 들어가 크메르 전통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닭고기 바나나 플라워 샐러드’, 캄보디아식 커리인 ‘아목’을 땀을 찔찔 흘리며 요리해 시식하고 사진을 찍었다. ‘톤레삽’ 호수 마을 중 가장 큰 ‘캄통 클레앙’ 수상(水上) 가옥에서 먹은 점심도 추천 코스. 여염집에 부탁해 마루에 상을 놓고 먹었는데 벽에 죽 내걸린 결혼식 사진이며 일력(日曆), 이발소 그림들이 낯익어 그 집 어르신들과 금세 친해졌다.

“오꾼(감사합니다)”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과 세월에 그을린 돌 사원들이 가슴을 흔들던 앙코르 유적지의 추억은 여운이 길다. 몹시 싸고 맛있었던 크메르 생맥주의 그것처럼 지금도 쌉싸름하게 입 안을 적신다.

● 시크릿 리트릿(Secreat Retreats)=‘비밀 휴양지’란 이름처럼 아시아의 영혼을 표현하는 호텔들의 모임. 한옥을 현대화한 한국의 ‘락고재’, 옛 귀족의 저택을 개조한 라오스의 ‘사트리’와 태국의 ‘라차만카’ 등 작지만 격조 있는 공간을 예술과 음식 등에 조예 있는 전문가들이 관리한다. 여행자들이 친척집을 찾은 듯 편안히 쉬면서 현지의 문화 취향을 느끼고 여행 안내서에 없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개별 가이드를 해준다. 한국에서는 ‘뚜르 디 메디치’(02-849-8580)가 예약 등을 대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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