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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800원 배추, 산지수집상 3번 거쳐… 밥상 오르니 5300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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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전남 진도군의 한 배추밭. 인부들이 1.5t 트럭에 배추를 담고 있다. 이 배추밭에서만 배추씨 파종에서부터 밭떼기 매매, 밭떼기 상인들끼리의 거래 등 3~4차례 유통 단계가 발생한다. [진도=장정훈 기자]

지난 4일 오전 11시 전남 진도 정자마을 배추밭. “유통 구조 줄인다고요? 현재 농가 사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산지수집상한테 포기당 400∼500원이라도 밭떼기로 넘기는 게 속 편하죠.” 월동배추 수확에 한창인 농민 김경재(62)씨는 “농민이 직접 도매시장이나 유통시장에 직거래를 하면 그에 따른 모든 위험을 직접 감수해야 한다”며 “사정이 이런데 복잡한 유통 구조만을 탓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자 일꾼 5명이 배추를 수확하고 있는 밭 한 필지가 나타났다. 990㎡(약 300평) 크기의 이 밭은 산지수집상 주영배(43)씨가 농가에 330만원을 주고 밭떼기로 구입한 것. 지난해 8월 농가로부터 사전계약을 통해 산 가격은 한 포기(3.3㎏·특등품 기준)에 800원꼴이다. 종자 값 350∼400원, 비료 값·인건비 200∼250원에 농가에 마진 200원을 줬다.

주씨 같은 산지수집상들은 배추를 밭에 심고 30일 이후인 지난해 8월 말부터 수확기인 올해 3월까지 직접 밭을 관리해 왔다. 그는 “파종부터 수확까지 언제 있을지 모를 태풍·강추위 등 천재지변에 소형 농가로선 대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마트 장희성 채소바이어도 “영세농가, 노령농가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산지수집상은 일정 부분 필요한 존재”라며 “농가는 산지수집상으로부터 선금을 받고, 도매상들은 공급을 산지수집상에 맡김으로써 재배 작황에 대한 위험회피(헤지)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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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확 이후 중간 유통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배추가격은 800원에서 3200원으로 껑충 뛴다. 우선 수확작업을 할 때 인부 작업비로 포기당 200원(총 45만원)을 들였다. 개당 150원 하는 그물망도 900개나 샀으며, 서울까지 트럭 운송비로 포기당 350원(총 52만원)을 지불했다. 이 가격에는 운송 중 이용하는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포함됐다. 여기에 밭떼기에 따른 손실보전비용이 포기당 1500∼1700원 선이다. 한 망(3개들이)에 5000원 정도를 보전비용 명목으로 가격에 붙이는 것이다. 주씨는 “이미 농가에 선금을 줬기 때문에 수확량 손실을 배추 값에 얹을 수밖에 없다”며 “평당 배추 10포기가 나와야 정상이지만, 지난해 여름 태풍 피해와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추위 때문에 이번에는 7포기밖에 안 나왔다”고 말했다.

  중간 과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농가가 산지수집상에 넘긴 배추는 경매에 오르기 전까지 다른 수집상에게 2∼3차례 전매로 넘겨진다. 주씨는 “총 10만 포기가 필요해도 밭떼기로 5만 포기를 사고 나머지는 배추 값이 더 떨어질 걸 감안해 나중에 사는 게 현실적이라 이런 전매 행위가 등장한다”며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포트폴리오 전략인 셈”이라고 말했다. 이천일 농림수산식품부 유통정책관은 “신선식품은 급변하는 기후에 생산량이 출렁이지만 소비자는 꼭 사 먹어야 하는 까닭에 값 등락 폭이 심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산지유통인들도 점점 ‘투기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렇게 산지수집상을 몇 번 거친 배추는 트럭에 실려 지난 4일 밤 10시30분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도착했다. “최상품이니까 이 배추가 오늘 낙찰 최고가 못 찍으면 안 된다네. 빨리빨리 결정합시다.”

  경매사가 쏟아내는 말이 끝나기도 전, 경매 차량을 따라 움직이던 30여 명의 손이 바빠졌다. 정식으로 가락시장 청과업체에 등록된 중도매인들은 모두 무선응찰기를 들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가격을 입력한 30초 사이, 곧바로 낙찰자가 정해졌다.

  4.5t 트럭에 한가득 실려 있던 배추는 망당 1만3200원을 부른 679번 중도매인에게 돌아갔다. 트럭당 900망(2700포기)이 실려 있으니 1160만원을 투자해 포기당 약 4300원을 주고 배추를 구입한 셈이다. 기자와 동행한 채소도매업계의 ‘큰손’ 신문수(55)씨는 “올겨울처럼 작황이 안 좋을 때는 경매과정에서 생기는 마진도 평소보다 커진다”며 “수확 이전부터 산지수집상들이 미리 대형마트 같은 소매업체와 직접 계약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농안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 안정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경매 대신 수의계약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그래도 여전히 채소는 가락동으로, 생선류는 다 노량진으로 모여든다”고 답했다. 신세계유통산업연구소 하익성 과장은 “지역별로 도매시장을 여러 군데 만들어 도매시장을 경쟁시켜야 해묵은 신선식품 유통 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중도매인에게 넘겨진 배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매상에게 넘겨졌다. 소매점은 김치공장·동네 채소가게·전통시장·대형마트 등이다. 소매 마진은 평균 500원 선. 하역비·물류비용(300원)에 이윤(200원)이 포함된다. 경매수수료는 200원 선(경매가의 1.5∼2%)이다. 결국 산지에서 800원에 시작한 배추는 복잡한 유통 과정을 거치면서 소비자 밥상에 포기당 5000∼5300원에 올라간다.

 배추를 포함한 신선식품 유통 구조가 복잡한 이유는 ‘수요탄력성’이 없어서다. 이상기후가 잦아지면서 생산량 예측이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소비수량은 큰 변동 없이 꾸준하기 때문이다.

 대안은 산지수집상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유통 단계를 2단계로 줄인 직거래와 로컬푸드(산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산지 주변 지역에서 판매·소비)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한국농산업경영연구소 이헌목 소장은 “직거래 장터를 늘리고 유통 단계를 줄이려면 산지에서 표준화·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고, 이를 산지에서 직접 품질을 판정해 직거래 장터로 보내는 게 필수”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 장기적으로 미국의 선키스트, 뉴질랜드의 제스프리처럼 대형화·전문화된 영농법인이 생겨 이들이 산지수집상 일을 대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최지영·장정훈·구희령·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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