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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출판]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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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지음/사계절,1만2천원

"서울로 올라와 관직 생활을 하면서 홀로 지낸 지 서너 달. 그간 일절 여색(女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아시오."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당연한 일인데, 어찌하여 겨우 몇 달 독숙(獨宿)했다고 고결한 체하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시오. 당신은 아무래도 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4백여년 전인 1570년 6월 조선시대의 양반 내외간에 오간 편지의 일부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한다'면서 정결한 생활을 자랑하는 남편에게 괜히 생색내지 말라며 대거리하는 부인의 꾸중이 매섭다.

주인공은 학자이자 관료인 미암 유희춘(1513~1577)과, 역시 학식과 예술에 능해 '덕봉집'이란 시집까지 남긴 부인 송덕봉.

부인의 힐난에 미암이 "당신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며 순순히 어리석음을 인정했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조선의 남녀관계와는 사뭇 다른 부부 간 권력관계가 보인다.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질서가 유례없이 강했던 시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엔 꽤 열린 사회였다는 게 최근 연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앞의 편지에서 보듯 16세기를 전후한 조선 중기엔 여성의 발언권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줬고, 여성의 바깥 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학문과 예술도 장려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사임당.허난설헌.황진이.이매창 등의 여성예술가가 대거 탄생할 수 있었다.

미암과 송덕봉의 관계가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당시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이 책은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1567년부터 11년간 미암이 거의 매일 기록한 한문 일기(미암일기.眉巖日記)를 토대로 당시 생활상을 재현한 것이다. 관직생활.살림살이.나들이.재산증식.부부갈등.노후생활의 여섯 편으로 나눠 저자의 해석과 상상력을 곁들여 현대식으로 풀어냈다.

남자가 첩을 얻는 게 용납되던 시대였지만 그 경우 정부인의 '혹독한 보복'을 각오해야 했다는 점, 양반과 노비의 관계는 일방적 억압이 아니라 매달 봉급을 지급하고 때때로 휴가를 보내줄 만큼 계약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점 등 당시 사람들의 심리 및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다.

미암이 전라감사 시절 성병의 일종인 임질에 걸려 덕봉에게까지 옮기게 되자 "순행(巡行)을 할 때 오랫동안 오줌을 못누고 참았기 때문에 걸린 병"이라고 둘러대는 장면 등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많다.

학문적인 엄밀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이 책의 약점이자 강점. 이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라면 논문의 참고도서 리스트에 올리기에 미흡할 수도 있겠으나, 역사 대중화라는 명제를 실천한 좋은 읽을거리임은 분명하다.

일반독자라면 가벼운 콩트처럼 읽어가면서 역사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을 권하는 이유다.

이영기 기자 ley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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