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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엔 선 '기업 Sale'] "제값에 빨리" 욕심만 앞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셀 코리아(Sell Korea) 전선이 흔들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주요 국내기업의 해외매각 협상이 번번이 막판에 결렬되고 있다. 하이닉스 반도체.대우자동차.한보철강.대한생명 등 부실 기업.금융기관 처리는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에 직결된다. 해외매각 협상, 무엇이 문제이고 전망과 대책은 어떠한지 등을 짚어본다.

2000년 10월 6일 아침 금융감독원 조사반이 대우 구조조정협의회와 자산관리공사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대우자동차와 한보철강의 매각협상이 결렬되자 협상을 담당했던 두 곳의 책임을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15개월이 흐른 18일 정부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AIG)컨소시엄간의 현대투신 등 현대계열 금융 3개사의 매각협상이 또 결렬됐다.

대우자동차.한보철강.서울은행.대한생명….

정부와 채권단이 3년 이상 해외 매각을 추진해왔으나 실패한 기업들이다. 대우차.한보철강.서울은행의 경우 양해각서(MOU)까지 체결했다가 막판에 결렬됐다. AIG컨소시엄과의 협상도 MOU까지 체결했었다. 과거의 실패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해외 매각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협상목표 부재'를 꼽는다. 매각대상 기업마다 사정이 다르다. 시간을 끌수록 값이 떨어지므로 하루빨리 매각하는 것이 유리한 기업과 서두르지 않고 제 값을 받아내는 게 나은 기업이 섞여 있다. 한보철강이 전자의 경우라면 서울은행.대한생명 등은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그동안 협상과정에서 '빨리' 팔면서 '후한 값'을 받아내겠다는 입장이었다. 모든 것을 얻어내겠다는 아마추어적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제때 팔지 못해 결국 값만 더 떨어지고 공적자금이 추가로 투입된 사례가 한보철강.대한생명 등 한둘이 아니다. 영국의 경우 1990년대 중반 대형 금융사고가 난 베어링은행을 사고난 지 한달여 만에 네덜란드의 ING에 거저 넘겼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은 여론을 너무 의식한 탓도 적지 않다.'헐 값 매각'을 시비 걸면서 동시에 '질질 끈다'고 비판하는 여론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당장의 여론에 신경쓰기보다 길게 봐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사안별로 목표를 정해놓고 협상 테이블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다.

협상력의 부재를 꼽는 전문가도 적지않다. 협상 경험이 거의 없는 공무원들이 프로들로 구성된 해외기업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스커더사의 존 리 이사는 "정부는 가격 등 원하는 목표만 정해주고 전문가인 매각 대행사에 맡기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걸핏하면 "언제까지 협상을 끝내겠다"고 정부 당국자가 공언하는 것도 아마추어적 행태다. 포드와 대우차 매각협상을 하던 2000년 9월 재정경제부장관.금융감독위원장.산업은행 총재 등이 한결같이 "한달 내 협상을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때문에 당시 협상 당사자들은 '정부가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 다시 세부적인 해결방안을 찾곤 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AIG컨소시엄과의 협상에서도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지난해 초부터 여러 차례 "곧 협상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정치적 이유 등에서 비롯된 이같은 공언은 상대방에게 미리 패를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양대 나성린 교수(경제학)는 "일부 관료들이 자신들의 임기 동안에 업적을 올리기 위해 결과에 집착하다가 화를 불렀다"고 지적했다.

기업 내부의 집단 이기주의도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워크아웃 상태인 부실기업의 노동조합이 매각 반대에 나서는 등 스스로 값을 깎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세정 기자 s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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