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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미셸 리와 달리 난 자유로운 반항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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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브라이언 리는 요즘 격투기에 빠져 있다. 잦은 부상으로 선수되길 포기하고 ‘코리안 좀비’로 불리는 세계 랭킹 3위 정찬성 선수 등의 매니저로 활동 중이다. [박종근 기자]

브라이언 리(42·한국명 이철희)는 삼남매 중 막내다. 두 살 차 누나는 전 워싱턴DC 교육감 미셸 리(이양희), 다섯 살 많은 형 에릭 리(이수희)는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변호사다. 공부 잘하는 형과 누나에게 부모님의 관심이 집중된 사이 그는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는 스스로를 “집안의 반항아였다”고 했다. 오하이오주립대는 배구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무릎 부상 때문에 그만두고 콜로라도대 영문과로 옮겼다. 이마저도 다니다 말았다. 1998년 할머니 병문안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어쩌면 한국에서 배우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연세어학당을 다니며 한국말을 배웠지만 어눌한 한국말로 할 수 있는 배역은 많지 않았다. 모델로 일하기에도 너무 ‘뚱뚱’했다. 1999년부터 아리랑TV MC로, EBS의 영어교육방송 진행자로 일했다. 그만의 독특한 진행 방식은 곧 청취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라디오라고 해서 꼭 밝고 모범적인 얘기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기분 나쁘면 ‘저 지금 기분나쁩니다’라고 하고, 기분 좋으면 농담도 하고. 그렇게 ‘제멋대로’ 방송하니 친근하게 느낀 것 같아요.”

 기회가 생기면 영화나 TV에도 출연했다. 영화 ‘괴물’에선 미국인 의사로, ‘펜트하우스 코끼리’에선 변호사로 나왔다. “현실에선 저랑 거리가 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들을 영화에선 다 해본 셈이죠.”

 요즘은 EBS ‘파워 잉글리쉬’(오전 7시40분~8시, 오후 10시40분~11시) 진행자로 일하며 가끔 성우일도 한다. 지난달 평창 스페셜올림픽에선 개막식 리셉션 행사도 진행했다.

 - 강한 이미지의 미셸 리 전 교육감과는 좀 달라 보입니다.

 “우리 형제는 자주 연락하고 지내요. 크리스마스 때면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죠. 요즘 누나는 새크라멘토 시장인 케빈 존슨(전 유명 농구선수)과 재혼해서 새크라멘토에 살아요. 교육감을 마친 후 LA·플로리다 등 많은 지역 교육계에서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죠. 지금은 ‘스튜던트 퍼스트’라는 NGO를 조직해 활동 중입니다. 누나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노력파였어요. 사실 누나한텐 교육감이 안 맞아요. 정치력이 있어야 하는데 성격이 너무 강해요. 아쉬운 소리도 못하고. 의회 의원들이 약속 시간에 늦으면 20분 이상 안 기다리고 가버려요. 남들은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기다리는데 말이죠.”

 - 어쨌거나 당신도 10여 년 한국의 영어교육계에 종사한 셈이네요.

 “미국은 너무 교육을 안 해서 문제지만, 한국은 교육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죠.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요. 몇해 전 영어학원을 운영한 적도 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고 놀랐어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걸 부모들이 알아야 해요. 가끔 누나한테 이런 얘기하면 잘 이해 못해요. 누나는 미국처럼 교육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한국처럼 관심 많은 게 좋 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영어를 잘하는 방법은 요.

 “시간이 걸려요. 기초부터 단단히 다져야 합니다. 언어는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한국 부모들은 문법, 단어 같은 데만 신경써요. 시험용으로요. 집을 지으면서 비(시험)를 막을 지붕부터 만드는 셈이죠. 그러면서 맨날 지붕만 만들다 말아요. 제대로 된 집을 지으려면 비도 맞고 바람도 맞아가면서, 터파기 공사도 하고 주춧돌도 세우고 해야죠.”

 영어교육은 그의 장기이자 생업이다. 하지만 요즘 그의 관심은 온통 격투기에 쏠려 있다. 그는 ‘코리안 좀비’로 유명한 세계 랭킹 3위 정찬성 선수의 매니저이기도 하다.

 “격투기의 매력은 다른 스포츠보다 본능적이라는 점이에요. 몸으로 사냥하고 싸우던 그 옛날의 본능. 땀과 피를 나누며 몸으로 쌓아가는 남자들의 의리 같은 게 있어요.”

 자신도 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훈련 중 왼쪽 눈 아래 뼈가 내려앉고, 어깨가 부러지면서 포기했다. 격투기는 취미로 하고 대신 매니저로 격투기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 시작했다. “사실 격투기 일을 하면서 수입이 많이 줄었죠. 해외 출장이 많아서 고정적인 방송일을 하기가 어렵거든요.”

 가끔 사람들은 그에게 ‘앞으로 뭐 할 거냐. 계속 그렇게 살 거냐. 누나는 뭐라고 안 하냐’며 걱정스런 눈빛을 보낸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스스로도 가끔씩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안정적인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으니 말이다.

 “글쎄요. 앞으로 일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지 않을까요. 돈은 좀 없어도, 남들도 좋고 나도 좋은 일하면서 살고 싶어요.”

글=박혜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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