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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글로벌 아이

‘정전협정을 도둑질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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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발표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오른팔을 높이 들고 선생님을 쳐다보았지만 외면하셨다.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한인 잡지에 실린 한국 청소년 글짓기상 수상작인데 베이징의 중국 학교에 다니던 초등 3학년생이 겪은 충격과 혼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국 국어 교과서에 실린 전쟁 영웅담을 외우는 시간. 상감령(上甘嶺) 전투에서 적진의 벙커에 뛰어들다 전사한 인민해방군 황지광(黃繼光)에 대한 글이었다. 어린 학생은 알 턱이 없었다. ‘포악하고 극악무도한 적군’이 국군 2사단과 미군 7사단이었다는 것을. 우리 전사에서 저격능선 전투로 부르는 이 혈전이 중국에선 ‘상감령 대첩’으로 통한다. 강원도 철원 저격능선 고지. 1952년 가을 42일 동안 전투가 벌어져 12차례 주인이 바뀌다 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중공군에게 내준 통한의 땅이다.

 중국 교과서는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으로 규정한다. 중국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고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정의의 역사관으로 포장해 후세에 주입하고 있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도 당사국의 일원으로 정전협정에 사인했다. 56년 제작된 영화 ‘상감령’의 주제가 ‘나의 조국’은 후진타오(胡錦濤)의 방미 때 백악관 만찬장에 울려 퍼졌을 정도로 13억 중국인의 애국심을 대표하는 노래가 됐다. 중국인들에게 이 전쟁은 남북한만의 전쟁이 아닌 것이다. 고사리손들뿐 아니라 당 간부 교육 때도 애국심 교육의 원천으로 삼고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과 강하게 묶인 전쟁이다.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에 중국인들의 심사가 뒤틀리고 있다. 인터넷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탄압으로 비참하게 생을 거둔 펑더화이의 사진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펑더화이는 항미원조전쟁의 대명사다. 중국도 나름대로 이 협정에 ‘저작권’이 있는데 무시당했다는 분노가 들끓고 있다. ‘정전협정을 도둑질 당했다’는 격분도 이어진다. 북한이 3차 핵실험 이후 공공연히 핵보유국을 자처하면서 화끈하게 북한 감싸기만 거듭하던 중국이 맞나 싶은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강도 높은 유엔의 제재에 동참하고 관영 언론의 자매지엔 북한의 정신없는 폭주를 비난하는 글들이 쏟아진다.

 ‘북·중 관계=혈맹’ 같은 단일 프레임으로는 중국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 왕정복고를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장면은 6·4 천안문 사태가 연상될 수밖에 없는데도 무삭제로 1000여 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다. 시진핑(習近平) 지도부가 출범하는 미묘한 시점에 불거진 우연의 연속 같지는 않다. 개혁·개방 30년의 성취와 공직 경력이 포개지는 사람들로 지도부를 짠 시진핑 시대라 더 그렇다.

정 용 환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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