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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부 기록 1088만 건 … ‘비밀’ 분류 하나도 없는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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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역대 대통령들의 기록물들을 보관해 놓은 대통령기록관 내부 전경. 이전 정부의 문서와 사진·영상·집기 등 다양한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다. [중앙포토]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 퇴임 때 대통령기록관에 넘긴 1088만 건의 정부 기록물 중 ‘비밀’ 기록이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다. 비밀 기록물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국가안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국가 기밀로, 보안업무 규정에 따라 청와대가 분류한다. 하지만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때 9700건에 달했던 비밀 기록물이 이명박 정부 때는 0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근혜 정부가 참고할 수 있는 MB 정부의 ‘공개된’ 통치 기록이 전무한 셈이다. 임상경 전 대통령기록관장은 “청와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비밀 기록물이 한 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라며 “고의든 그렇지 않든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 연속성 끊어질 우려

이명박 정부가 대통령기록관에 넘긴 정부 기록물은 총 1088만 건이다. 사진은 직원들이 기록물을 확인·운반·보관하고 있는 모습(왼쪽부터). [뉴시스]

 대통령 기록물은 일반·비밀·지정 기록물 등 3단계로 분류된다. 이 중 비밀 기록물은 국가안보상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지만 차기 대통령과 국무총리, 해당 부처 장관들은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록이나 국가위기 대응 매뉴얼 등이다. 전직 국가안보 관계자들은 “NSC 회의록은 내용에 따라 비밀 기록물일 수도 있고 이보다 상위 개념인 지정 기록물이 될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지정 기록물은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 아예 후임 정부에서도 내용을 볼 수 없도록 밀봉해 놓은 기록이다. 이 기록물은 보통 15년 이내에서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지정되며 최장 30년까지 봉인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중요한 안보 기록 등을 폐기한 일은 없으며 전부 지정 기록물로 분류해 놓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설명대로 모든 주요 기록을 지정 기록물로 해놓았다고 해도 문제는 심각하다. 일단 지정 기록물로 분류되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있거나 수사기관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열람하는 경우가 아니면 지정된 기간 내에는 내용은 물론 그 목록조차 볼 수 없다. 당연히 후임 정부의 장관은 물론 대통령도 볼 수 없다. 테러와 핵 관련 사고, 대형 재해나 금융전산·정보통신(IT) 사고 등 각종 사회적 위기가 발생할 경우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때의 긴급 조치사항이나 위기 대응 매뉴얼을 전혀 참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외국과 교섭에 나설 때 이전 정부에서의 진행 상황과 협상 노하우를 파악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지난해 대선 당시 논란이 됐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무효화 발언’도 지정 기록물 존재 여부에서 비롯됐다. 새누리당이 이 문건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고소 고발로 오갔고 결국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검찰은 “공익적 목적을 위해 열람이 필요하다”는 유권해석을 통해 이 자료를 열람했다.

 NLL 발언 기록의 경우 그나마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열람이 가능해졌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어떤 자료가 지정 기록물로 돼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정작 국익 차원에서 꼭 알아야 할 자료들이 있어도 지정 기록물로 묶여 있으면 열람 자체가 불가능하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는 “외교·통일 업무의 경우 차기 정부가 연속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전부 지정 기록물로 해놓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불법 사본’ 존재 논란도

 이에 대해 MB 정부 때 청와대 관계자는 “지정 기록물로 분류됐지만 자료를 생산한 부처에 사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열람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 ‘원본’을 봉인해 놓았는데 ‘사본’은 열람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검찰 관계자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보면 사본에 대한 규정은 없다”며 “사본 자체가 불법일 수 있고, 따라서 이를 열람하는 것도 당연히 위법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국가안보상 봉인해 놓은 자료의 사본을 해당 부처에서 돌려본다면 입법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란 지적이다.

 그나마 ‘불법 사본’조차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적잖다. 노무현 정부 때 NSC 사무차장을 지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대통령 주재 회의록처럼 작성 주체가 청와대인 경우 각 부처에서는 그 기록을 보관하지 않는다”며 “가령 천안함 사태 때 긴급 회의록 등 중요 문서들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 생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해명과 달리 모든 기밀기록이 지정 기록물로 분류된 게 아니라 일부는 폐기됐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노무현 정부 때 34만 건이던 지정 기록물이 이명박 정부 때는 24만 건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비밀 기록물들을 일반 기록물로 전환했을 가능성은 더욱 적다. 국가 기밀사안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보안업무 규정 위반이다.

 구두 보고를 선호하고 개인 e-메일로 중대 사안을 보고받거나 지시했던 이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지적하는 쪽도 있다. 중대한 기밀에 해당할 내용이 기록조차 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얘기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선임 간사는 “이 전 대통령이 독대와 대면 보고를 선호해 주요 사안들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정 간사는 “지금이라도 봉인된 지정 기록물을 재분류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여야 “국회서 반드시 짚고 갈 것”

 정치권도 JTBC가 이명박 정부의 비밀 기록물 ‘0’ 의혹을 단독 보도한 뒤 잇따라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은 “이명박 정부가 남긴 기록물 대다수가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물이나 온라인 시청각 게시물 등이란 사실은 충격적”이라며 “테러나 핵 문제 같은 중대 사안에 대해 차기 정부가 참고할 만한 기록이 없다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통합당은 “국회 차원에서 ‘비밀 기록물 0건 의혹’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겠다”며 적극 대응 방침을 밝혔다. 김현 대변인은 “이명박 정부가 같은 여당 출신의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아예 볼 수조차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라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책임을 물어 바로잡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신후 JTBC 기자

◆ 노무현·이명박 정부 기록물 비교

-이명박 정부 : 총 1088만건(비밀기록물 0건, 지정기록물 24만 건)

-노무현 정부 : 총 825만건(비밀기록물 9700건, 지정기록물 34만 건)

[자료= 대통령기록관]

◆ 대통령 기록물 분류

-일반 : 일반인 열람 가능

-비밀 : 차기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 비밀 취급 인가권자만 열람 가능

-지정 : 해당 기록물을 만든 대통령만 최대 30년간 열람 가능(단,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또는 고등법원장 발부 영장이 있는 경우는 열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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