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4)금석학의 태두 추사 김정희(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공리공담을 배격 고구려석각 고증>
다시 평양성벽의 석각을 고증하여 「소형」이 고구려시대의 관명임을 밝히었는데, 이같은 그의 학문적 업적은 저서「금석과안록」으로 나타났고, 한편으로 많은 우리 나라의 금석척본을 청의 교우들에게 보내었는바 그중 유희해는 이를 토대로 동해 금석원 8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다음 그는 실사구시설을 통하여 근거가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아니 됨을 주장하였다.
즉 학문에 있어서는 반드시 원인을 밝히고 자기로서 시비를 가린 다음 이를 실천하여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주자학의 공리공담을 크게 배격하고 실증과 실용을 중히 여겼는데 이러한 그의 실사구시설은 이른바 실학파의 주장을 잘 나타낸 것이었다.

<신기 감도는 필체 그림에도 뛰어나>
다음 서예에 있어서는 그의 천재적 재질도 중요하지만 대성을 위한 그의 오랜 적공과 마음의 수련이 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왕희지 구양순 등 중국 역대명필의 필체를 주로 고비에 남겨진 그 진적을 통하여 두루 체득함과 아울러 청고하고 고아한 마음가짐에 힘쓴 끝에 드디어 제가의 장처를 집대성하여 독특하고 신기가 감도는 자가의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 나라의 서도사상뿐 아니라 동양전체를 통해서도 대서특필할 거장이었다. 그는 글씨 외에 그림과 시에도 뛰어났는데 역시 타인의 모작을 능사로 하는 따위가 아닌 기발하고도 독창적인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관계서 활약 옥사로 귀양살이>
그는 위와 같이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는 한편 남 못지 않게 당시의 관계에서도 활약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벼슬을 살면서도 학문과 예술을 잊지 않았다고 함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생원시 합격 후 10연만인 1819년(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세자시강원설서(정칠품) 예문관 검열(정구품) 규장각대교(정칠∼구품) 등 화직을 거치고 41세에는 호서안찰사로 나가 탐관오리의 숙청에 공을 세웠으며 다시 승지(정삼품) 성균관대사성(동상)을 거쳐 병조와 형조의 삼판(종이품) 등을 역임(54세)하면서 청렴과 결백으로써 중망을 모았다.
그러나 그가 45세이던 1830연부터 그 부자의 관운에는 부행이 싹트기 시작하여 그해에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그 자신도 1840년(헌종6)에는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귀양가 이후 9연이란 오랜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1848年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3연후인 철종2연에 다시 영의정이며 그의 친우이던 권돈인이 헌종의 묘례를 잘못 의논한데 연좌하여 66세의 노령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또 귀양갔다.
이번에는 그 익년에 귀유할 수 있었지만 전후10여년에 걸친 유배생활로 말미암아 제주도에서는 한때 앉아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수척하였고 멀리서 부인 예안리씨의 부음을 듣고 단복의 비념에 잠기기도 하였으며 북청에서는 70∼80일 동안을 앓아 누워 거의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난 중에서도 그는 끝내 학문과 예술을 저버리지 않았을 뿐더러 원근에서 찾아드는 문도들을 마음껏 지도하여 제주와 북청지방의 개화를 북돋우었다한다.

<종교로 관심 돌려 예술에 깊은 영향>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그로 하여금 적이 속세를 떠난 종교적인 면으로 관심을 쏟게 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특히 16세에 어머니를 사별한 후 불법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그의 예술에도 이러한 영향이 적지 아니 나타나 있다. 더우기 노년에 이를수륵 백파·초의 등 명승과 깊은 교우를 맺어 그들과 더불어 변론을 벌일 정도로 불선에 관해 깊은 조예를 쌓았다.
그리하여 70세 되던 해에는 마침내 과천 관악산록에 있는 부친묘소 곁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썼고, 그 다음 해에는 광주봉은사에 들어가 불법에 귀의한 후 돌아와 동년10월10일에 71세를 마지막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또한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니 제주도로 유배될 무렵에는 한때 입교할 준비까지 갖추었다고 전하며 나아가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식견을 가졌었다.
1944년에는 서양선적의 내도를 보고 국인들이 함부로 동요하지 말도록 경계한 일이 있고 또 실인 위원이 해방에 관해 저술한 「해국도지」를 우리 국민이 달리 읽어 서양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권장하기도 하였다.
유홍열<대구대학장· 문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