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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시 쓰기는 출산과정과 동일"

중앙일보

입력

바야흐로 페미니즘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성주의를 시도하는 시는 섬뜩하고 기묘하고, 심지어 엽기적이라는 평을 듣기 일쑤다. 예컨대 지난해 한 여성주의 시선집에 실린 시를 보자.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중략) //내가 살아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최승자 '일찍이 나는'중)

자신이 곰팡이이며 원래부터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은 듣기에 섬뜩하지만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야 여성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시인이자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김혜순씨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은 이런 여성적 글쓰기를 옹호하는 메니페스토(선언) 다.

그러므로 이 시론집은 시란 마땅히 이런 것이다라거나 좋은 시란 어떤 것이다를 논구하는 책과 다르다.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 "여성의 언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에서 터져나온다. 여성의 언어는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인 것이다"는 사실을 드러내려 애쓴다. 여성 시인들에게서 왜 환상성과 죽음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할까.

"여성 시인들의 시에 내재한 환상적 공간은 비현실이라는, 혹은 반현실이라는 개념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들의 무의식 속을 바탕으로 한 또하나의 심리적 현실을 구축한 공간"(38쪽) 이기 때문이다.

여성적 시쓰기는 시적 화자가 대상을 장악해 아름답고 추함이란 이분법에 안착하는 기왕의 방식으로는 다시 가부장제와 남성적 욕망에 빠져버린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여성적 시쓰기란 고통 속에 아이를 낳되 소유하고자 하지 않는 출산의 과정과 동일하다는 얘기를 전한다.

그것은 "시적 자아가 스스로 포기되는 글쓰기의 장"(79쪽) 이며 시에 '쓰다'라는 술어대신 '하다'라는 술어를 연계시킨다(1백51쪽) .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면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얘기를 귀담아들어야겠다.

"소위 현대 서정시의 독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가 있다면 자신들이 이제까지 허구적으로 구축했던 관념들,이를테면 외면과 내면, 상위개념과 하위개념, 미와 추 등의 경계를 때려 부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현대시를 읽어야 한다."(1백29쪽)

평론집도 시작법 강의도 아닌 이 '기괴한' 시론집은 이전에는 거의 시도된 적이 없었으며(서강대 김승희 교수)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려는 듯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순간을 자극하는 미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글 한 편 한 편이 신들려 행하는 한판 굿처럼 짜임새있게 직조돼 있다.

이미 시집 『불쌍한 사랑기계』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시인인 저자가 시론(詩論) 으로 학위를 딴 이력이 있기 때문일까. 여성주의 시를 위한 선언이긴 하되 공허한 외침만 남은 선언이 아니라 바리데기 신화 분석 등 구체성이 가득한 이 책은 새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세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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