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김정은과 로드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얼마 전 북한의 평양에 미국 프로농구(NBA)출신인 데니스 로드맨이 나타났다. 그는 국빈 대우를 받으면서 김정은 북한의 노동당 제1비서와 함께 농구를 관람하였다. 로드맨은 노타이에 북한이 싫어하는 USA 마크의 모자를 쓰고 코카콜라 캔을 옆에 두는 등 북한의 최고지도자에 대하는 태도로는 매우 불성실하였다. 그런대도 김정은은 괘의하지 않고 농구를 좋아하는 철부지 소년처럼 박장대소를 하면서 로드맨과 시간을 보냈다.
김정은은 체통을 잊고 몸을 기울려 로드맨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학생이 농구에 대한 해설이라도 듣는 듯 진지한 모습이다. 김정은을 매료시킨 로드맨은 귀국하면서 김정은을 “대단한 친구(awesome guy)”라고 추겨 세웠다.
이러한 모습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일려지자 사람들은 북한이 과거 중국에서 배운 공(球)외교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왜냐하면 40여 년 전 중국은 탁구공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1971년 봄 제31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된 일본 나고야는 벚꽃이 만발하였다. 특이한 것은 1965년 이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중국 팀이 참가한 것이다. 문화혁명의 와중에서도 중국은 과거 3번에 걸쳐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인 30세의 장저둥(莊則棟)을 부단장 겸 선수로 보냈다.
중국은 한 때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자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미국 등 서방세력을 끌어넣어야 했다. 나고야 대회에 장저둥을 출전시켜 미국의 의향을 떠 보는 중요한 외교가 숨어 있었다. 예상대로 장선수가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의 글렌 코완 선수와 5분간 인사를 교환한 것이 세계의 톱뉴스가 되었다. 그 후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에 초대되는 등 탁구공을 사이에 두고 물밑 교섭이 이루어져 미국과 중국 수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나고야의 작은 탁구공이 지구라는 큰 공을 움직였다고 흥분하였다. 이번에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가 미국의 로드맨을 불러 농구 시범경기를 같이 관람한 것이 평양의 농구공을 통해 미국이라는 큰 공을 움직여 보자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금년이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로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만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해 중국도 참여하는 유엔의 강도 높은 새로운 제재 결의안이 조만간 채택될 것으로 보여 불안해하고 있다. 북한은 오히려 벼랑 끝 전술로 정전협정 백지화를 들고 나오고 서울과 워싱턴을 핵으로 타격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한국과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40여 년 전 미중관계는 오늘날 북미관계와 다르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세계여론에 굴복하지 않고 있어 평양의 농구공은 나고야의 탁구공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