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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한미수호조약|민병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882년 5월22일자로 조인된제1차한·미수호조약(다음해 2월13일미국회에서비준)은 당시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던 국제정치의 소산이었으니, 무엇보다도 일본의 단독진출을 저지할의도에서 이홍장이 알선함으로써 동조약이 천진에서 교섭되었다는 사실로도 짐작이가는노릇이다.
강화수교(1876년2월)로써 한반도에서 역사적으로 전통화되다시피하였던 청국의 정치적·군사적배경을 단절시키고한국을 호립화하는데 성공한 일본이 미국의 대한접근을 환영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당초에는 수교국인 일본을통해서 한국과의 통상·우호관계수립을시도한 미국측의 노력이 실패하였던 배후에는 일본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까닭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수없다.
또한 같은의미에서 청국이 한반도에 대항 일본의 단독지배를 배제하기 위해서 제3세력으로하여금 이와 대치시켜야된다는 결정을 하게되고그럼으로써 한·미수교를한국측에 권장하는 한편 자진 알선에 나서게되었다는 점은 동조약의성격을 말해주는 일면이아닐 수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빈국의 이러한「조선책략」은「셔먼」호사건(1866년)이래지붕되던 미국의 대한수교목적을 뜻밖에도 조속히실현시키는데 도음이 되기는 하였지만 한반도에대한 일본의 독점적지배태세확립을 저지하지는못하였다. 처음에 일본이 미국측으로부터 대한수교의중개역을 의탁받고「한국이 마치 일본의 보호국이나되는 듯이 보이기위해서 그교섭을 조종하기에 열중」(S.F. Bemis"A Diplomatic History of the U.S")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청국역시 같은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다 서구세력을초치함으로써 일본의 단독적이권부식을 중화하려던 청국의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일본의 대한진출을적극화시키는자극적역할을하지않을수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측교섭을 담당한「슈펠트」제독의 입장으로는 한편일본의 시기와 방해를 배제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미국의「힘」을 한반도에결부시킴으로써「이이제이」하며「 숭방」의 위세나 부려보자던 이홍장의 야망(을유문화사간「한국사」최근세편743면)을 물리치고 미국의국가적이해관계에입각한대한수교교섭에헌신몰두한끝에 드디어는발병까지하기에이르렀었다.
전문외 14개조항으로된동한·미수호조약은일본과의「페리」조약에 비해 대동소이한것으로 제4조의치외법권조항이 특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미·일조약과는 현저히 다른점이있었으니 하나는 한국의법률개선을 전제로한 불평등조항의 철폐기약이 삽입되었다는 점이며 다른하나는 제1조의이른바「거중조정」조항이그것이다.
물론 첫째의 불평등조항은 일본의 경우와 같은조약개정운동이 미처싹트기도 전에 1905년의 한·일조약으로써 사실상 한·미조약은 무효가된 셈이며 또한 둘째의「거중조정」조항도 1905년을 전후하여 한국측이 일본의 침략적진출을 견제하는방비로 삼으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적용의때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한·미조약은 한·미양국이 최초의외교관계를 맺는 초석이되었고 또한 문화교류의 매개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이조약이 계기가되어 민영익을 비롯한 홍영식 서광범 유수등의조야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직접, 간접으로 새로운 문화수입에 눈Em기 시작하였으며 선교사·교사들이 미국으로부터 이 땅에들어오기시작하였다.
한국의 개화기에서 미국문화의 영향은 참으로 막대하였음을 부인하지못한다. 그러나 동조약이지니던국제정치적성격은위·일전쟁을거쳐일본이노·일전쟁을 겪게되면서 한반도에서 「항구적인 특수이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면서 완전히 변모되고 말았다. 전통적인영·노대립관계가「아시아」무대에서영·일동맹(1902∼1904년)을 맺게 하였던 때를 같이하여 악명높은「타프트·가쓰라」밀약(1904년)은 드디어한·미수호조약의 기본정신과 기반은 완전히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필자·고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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