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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노골적 PPL 사람이 중심에 있던 노희경 드라마 맞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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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 21면

좀 당황스럽다. 최근 ‘아이리스2’ ‘7급 공무원’과의 치열한 지상파 수목 드라마 대전에서 1위를 하고 있는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얘기다.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드라마 내용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실시간 검색어엔 ‘송혜교 립스틱’ ‘조인성 코트’가 오른다. 역시 실시간으로 트위터엔 ‘롱 카디건을 입은 조인성에 빠져 있다가 문득 내 방 거울을 봤더니 오징어 한 마리가 서 있더라’부터 ‘송혜교 립스틱, 님이 바르면 그런 색깔 안 나와요’ 같은 화제가 끊이질 않는다. 한마디로 두 주연 배우의 미모 예찬과 그들이 걸치고 나오는 제품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칭찬 일색이다.

컬처# : SBS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유감

다른 드라마라면 톱스타 캐스팅이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겠다. 한데 이 드라마가 그러니 왠지 위화감이 생긴다. ‘노희경 드라마’이기 때문일 거다. 노희경(47사진) 작가는 시청률에 관계없이 열혈 고정팬 층을 형성해낸 작가다. 그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노빠’인 내게도 노 작가는 ‘작가’와 ‘작품’이란 단어가 인플레로 느껴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인형 같은 배우들이 상투적인 대사를 로봇처럼 읊는 그렇고 그런 드라마 속에서 노희경 드라마는 달랐다. ‘그들이 사는 세상’ ‘꽃보다 아름다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바보 같은 사랑’ ‘거짓말’ 등 노희경 드라마의 중심엔 항상 ‘사람’이 있었다. 연인과 가족을 둘러싼 현실적이면서도 통찰을 담은 관계 묘사, 시어(詩語)나 잠언이라고 해도 좋을 디테일한 대사 등은 노희경 드라마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15% 가까운 시청률을 올리고는 있지만 이번엔 좀 위태로워 보인다. 물론 주·조연 가리지 않고 모든 등장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장기는 여전하다. ‘아이리스’ ‘빠담빠담’으로 인정받은 김규태 PD가 공들인 ‘때깔’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노희경다운’ 요소가 그렇지 않은 요소에 압도당해버린 듯하다. 배우를 예뻐 보이게 하기 위한 클로즈업이 빈번하다 보니 이야기에 실려야 할 무게중심이 배우의 외양을 전시하는 쪽으로 쏠린 듯한 인상이다.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는 건 지나친 PPL(간접광고)이다. 송혜교가 모델인 화장품 브랜드 라네즈, 조인성이 모델인 신사복 브랜드 파크랜드가 협찬사인데 브랜드 노출이 노골적이다. 가령 송혜교가 라네즈 립스틱을 시간 들여 꼼꼼히 바르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극중 송혜교가 물려받은 재벌그룹 이름은 파크랜드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PL그룹이다. 조인성이 양복을 입어보는 장면에선 송혜교는 “남자 옷은 우리 회사 옷이 최고야”라는 민망한 대사를 하기도 했다.

당초 일본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의 리메이크라는 태생(?)에서 노희경다움이 많이 퇴색되리란 관측이 나오긴 했었다. 소재부터 한국 드라마에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한 재벌집 얘기다. 재벌의 눈 먼 딸 오영(송혜교)과 어려서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오빠를 사칭하고 오영에게 접근하는 오수(조인성). 둘의 사랑 얘기는 예상대로 통속극의 수순을 밟고 있다. 신분세탁이나 뇌종양, 실명 등의 설정은 웬만한 작가라도 헤쳐나가기 힘든 상투의 덫이다. 등장 인물들의 갈등이 조금만 고조돼도 바로 귀에 꽂히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배경음악은 짜증스러울 정도다.

요컨대 노희경 드라마에 노희경이 없는 형국을 작가가 어떻게 돌파해낼까. 개인적으론 가장 기억에 남는 노희경 드라마로 1999년 방영된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를 꼽는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살고 싶어하는 남자-죽고 싶어하는 여자라는 설정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사는 게 재미있는 여자(김혜수)-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배용준) 조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 드라마도 사랑을 믿지 않던 가난한 남자가 결국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 품에서 뇌종양으로 죽는 통속극이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 “누굴 사랑하는 게 겁나지? 사랑이 널 바보로 만들까 봐. 아서라, 세상은 바보 같아. 바보 같이 사는 게 옳아.”

아직까지 ‘그 겨울, 바람이 분다’엔 명대사라 꼽힐 만한 대사가 없다. 16부작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가 노희경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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