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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러시아 정복한 미국인 클라이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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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반 클라이번

피아노 하나로 철의 장막을 뛰어넘은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숨졌다. 79세. 뉴욕타임스는 클라이번이 27일(현지시간) 텍사스주 자택에서 골(骨)암으로 사망했다고 28일 보도했다.

 클라이번은 1934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덕에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가로의 길은 일찍부터 정해졌다. 석유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그를 선교사로 키우려 했지만 연주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17세 때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한 클라이번은 54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한다. 콩쿠르는 49년부터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했는데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등이 심사위원이었다.

 58년, 클라이번은 미국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다. 러시아의 자존심인 차이코프스키를 내세운 콩쿠르, 그것도 첫 대회에서 미국 피아니스트가 우승한 건 두 나라에게 충격이었다. 한 해 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충격을 받은 미국민들에게 클라이번은 영웅이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표지에 실으며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고 했다.

 콩쿠르를 끝으로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59년 뉴욕필과 협연했지만 혹평이 쏟아졌다. 78년 무대를 떠나 89년 복귀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였다. 2008년 인터뷰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후 20년 동안 그 순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콩쿠르 우승이 큰 압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를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009년 이 콩쿠르에서 준우승하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강기헌·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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