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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27) - 칼 야스트렘스키 [3]

중앙일보

입력

사실 야스트렘스키는 이 해에 팀 내에서도 최고의 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칭호는 15승을 올리며 리그 신인왕 자리를 차지한 슈월의 것이었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아메리칸리그 10개 팀 중 6위에 그쳤다.

1962년 스프링캠프에서 야스트렘스키는 마지막 한 주 동안 폭발적인 기세를 보이며 좀더 좋은 활약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이 해 6월 23일, 그는 팀 동료가 야구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우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레드삭스는 이 날 로스엔젤레스 에인절스와 대결하였는데, 야스트렘스키는 5회에 상대 유격수 조 카피가 날린 처리하기 극히 어려운 타구를 '그린 몬스터' 바로 앞에서 잡아내었다. 결국 이 날 선발로 나선 얼 윌슨은 아메리칸리그 흑인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노히트게임을 기록하는 영광을 안았다.

야스트렘스키는 이 시즌을 .296의 타율과 19홈런, 94타점으로 마감하였다. 이는 전년도에 비하여 좀더 향상된 성적이었지만, 팬들로 하여금 테드 윌리엄스를 잊게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1962시즌이 끝난 뒤, 히긴스는 과거 레드삭스의 유격수로 홀약하였던 자니 페스키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히긴스가 로만 메히아스를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야스트렘스키의 포지션 이동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페스키 감독은 메히아스를 좌익수로 기용하고 야스트렘스키에게는 중견수를 맡기는 문제를 검토해야 했다.

결국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야스트렘스키와 게리 가이거는 1963년에도 각각 좌익수와 중견수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 다만, 전년도에 캐럴 하디와 우익수 역할을 분담하였던 루 클린턴이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 외야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였다. 야스트렘스키가 3년만에 또다시 포지션을 옮기는 부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야스트렘스키에게 1963년은 완전히 스타로서 입지를 굳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해였다. 그는 이 해에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321의 타율을 기록하여 리그 타격왕이 되었다. 또한 안타와 2루타 부문에서도 수위에 올랐으며, 외야수 부문 골드글러브도 처음으로 수상하였다. 그러나 팀은 여전히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리고 1964년, 레드삭스는 심각한 내분을 겪기 시작하였다. 감독 페스키는 1루수 딕 스튜어트의 노골적인 도전에 직면하였고, 야스트렘스키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시즌 막판에 페스키는 해임되었고, 빌리 허먼이 새 감독이 되었다.

허먼 역시 레드삭스의 구세주는 되지 못했다. 1965시즌에 레드삭스는 33년만에 처음으로 100패를 당하였으며, 5번째 시즌을 치른 두 익스팬션 팀에게도 뒤져 리그 9위에 그쳤다. 그러나 그 책임이 야스트렘스키에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이 해에 출루율과 장타율에서 리그 선두에 올랐으며, 트윈스의 토니 올리바에 이어 타율 2위에 올랐다. 또한 전년도에 놓쳤던 올스타 자리와 골드글러브도 되찾았다.

1966시즌을 앞두고, 야스트렘스키는 팀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는 팀 고위층(특히 구단주 탐 요키)와 선수들 간의 의사 소통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수들은 야스트렘스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정신적으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66시즌을 그리 대단하지 않은 성적으로 마감하였다. 팀 역시 하위권 탈출에 실패하였다. 허먼 감독은 시즌 막판에 코치 피트 러널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당시의 야스트렘스키는 타격의 정확성이라는 면에서는 뛰어났으나, 장타력으로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테드 윌리엄스를 기억하는 팬들에게 그는 그다지 만족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 레드삭스의 스카우트였던 에디 캐스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하였다. "야스트렘스키는 좋은 팀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기 실력을 드러낼 것이다."

1966시즌이 끝난 뒤, 그는 진 버드를 만나며 변신의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헝가리 출신인 버드는 본래 복싱 트레이너였으나, 미국에 이주한 뒤 야스트렘스키의 집 근처에 위치한 호텔의 피트니스 디렉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야스트렘스키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였다. "이봐, 자네는 자기 자신의 몸이 운동하기에 적합한 상태라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선수도 아니야. 내가 자네를 제대로 된 선수로 만들어 주지."

야스트렘스키는 버드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표시하였고, 그와 함께 1주일에 6일씩 강훈련에 임하였다. 그 훈련은 달리기와 역기 들어올리기를 비롯한 갖가지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야스트렘스키는 점차 근력을 길러 나갔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버드는 야스트렘스키에게 예언자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올해는 자네 생애 최고의 시즌이 될 걸세."

한편 레드삭스는 1967시즌을 앞두고 딕 윌리엄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전임자 러널스와 마찬가지로 한때 야스트렘스키의 팀 동료였으며, 인터내셔널리그의 레드삭스 팜 팀인 토론토의 감독으로 좋은 성적을 올린 뒤 처음으로 빅 리그에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말할 것도 없이 경험부족이었다. 그는 사실 이 때에 아직 30대였으며, 당시 양키스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던 화이티 포드보다도 젊었다. 레드삭스에는 윌리엄스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없었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는 명백히 '애송이'였다.

그러나, 그는 팀을 철저하게 자기 방식대로 이끌어 갈 것임을 천명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는 팀 개혁의 일환으로, 야스트렘스키가 맡고 있던 주장 자리를 없앴다. 그 일차적인 목적은 물론 자신 외에는 '보스'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지만, 야스트렘스키에게도 이 조치는 도움이 되었다. 심리적 부담을 한결 덜게 된 그는 경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레드삭스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레드삭스는 화이트삭스, 트윈스 등과 함께 선두권을 형성하였고, 야스트렘스키도 크게 향상된 장타력을 과시하였다. 시즌 개막 후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야스트렘스키는 이미 10홈런을 기록한 상태였다.

두 '삭스'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6월, 화이트삭스 감독 에디 스탱키는 한 기자에게서 야스트렘스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박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녀석은 목 밑만 본다면 올스타감이지." 이 말의 의미는 물론 야스트렘스키를 '머리에 든 것은 별로 없는’ 선수로 비하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야스트렘스키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리고 그 발언이 보도된 직후, 레드삭스와 화이트삭스 간의 더블헤더에서 야스트렘스키는 9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스탱키의 콧대를 꺾어 놓았다. 특히 이 날 시즌 15호 홈런을 친 뒤에는, 베이스를 돌다가 스탱키을 응시하며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스탱키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고, 야스트렘스키가 올스타전에 주전 좌익수로 나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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