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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마리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실을 바꿔놓을지 모른다. '마리이야기'의 오프닝을 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눈내리는 도심 상공을 갈매기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마치 실사영화처럼 화면은 자유롭게 시점을 옮겨가면서 새의 비행을 목격한다. 때로 새의 시점으로 바뀌어 회색빛 허공을 바라보곤 한다. 장관이다. 그런데, 도심에 왠 갈매기? '마리이야기'의 도입부는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잠시, 어린 날의 추억과 판타지가 방문할 것임을 암시한다. 그 방문은 돌연하고, 아주 어렴풋한 추억의 빛을 되새기도록 한다.


'마리이야기'는 한 구석진 시골 마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곳엔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지만 멋진 꿈을 간직한 아이가 살고 있다. 남우다. 남우는 바닷가 마을에서 할머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고양이 요와 등대 주변에서 놀던 남우는 등대 안으로 발을 딛는다. 그안에서 신비로운 구슬을 발견한 남우는 갑작스럽게 환상의 세계를 접한다. 아름다운 빛과 이미지로 충만한 세계에서 남우는 마리라는 소녀를 처음 만난다. 한편, 궂은 날씨에 배가 출항하자 동네 사람들은 선원들의 안전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남우는 자신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리이야기'의 디테일은, 놀라울 지경이다. 캐릭터들이 무심하게 서있는 배경들, 그들 주변에 널린 작은 종이광고물, 지하철 노선도, 그림들, 애니메이션 속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작품 내부엔 꼼꼼한 수작업 흔적이 배어있다. 아마도 '마리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이야기보다 작품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은 세부를 발견하는 재미가 솔솔함을 깨닫게될지 모른다. 캐릭터도 독창적이고 개성있다. 선과 표정이 단순화되어 있으면서도 정감을 보존하게끔 정밀하게 설계된 각 캐릭터들은 이 작업에도 꽤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음을 알수 있도록 한다.

'마리이야기'의 놀라운 디테일은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다. 스탭들은 3D와 2D작업을 번갈아하면서 배경과 캐릭터 움직임을 조율했으며 앞서 언급한 오프닝 장면에선 3D 미니어처 조감도 작업을 통해 환상적인 시점 숏을 창조했다. 특히나 마리와 남우가 만나는 판타지 장면은 색감이나 몽환적인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이다. 여기에 합세해 영화음악을 작곡한 이병우의 섬세한 선율도 한몫 거든다. '마리이야기'의 동화적이고 서정적인 극의 흐름을 밀고 끌어준다.

'마리이야기'를 만든 이성강 감독은 '덤불 속의 재' 등의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알려진 인물. 이성강 감독은 작품에 대해 "환상은 환상이지만 특별한 목적의식이 없는, 일상에서 만난 듯한 환상을 담고싶었다"라며 연출의도를 밝힌다. 나이먹은 남우가 다시금 어린 시절의 환상을 떠올리고 그 세계를 잠시 방문한다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설득력을 배가하는 장치이자 성인 관객을 배려한 안내문이기도 하다.

작고 귀여운 상상 속 세계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 그럼에도 '마리이야기'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테크닉과 캐릭터 작업 등의 과정은 수려하지만, 이야기가 다소 헐겁다는 점이 그것. 남우의 보잘 것 없는 일상과 귀여운 판타지가 만나고 충돌하는 지점이 경사가 너무 큰 까닭에 영화를 보는 이는 때로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구석이 있다. 이 간극을 더 조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거다.

'마리이야기'는 이제껏 국내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졌던 이에겐 흡족한 결과물이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서 이정도 완성도를 갖춘 작업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유다. 은은한 파스텔톤 색조가 배어있는 '마리이야기'는, 좀더 훌륭한 원작의 필요성과 국내 애니메이션의 희망을 함께 생각케하는 계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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