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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체육계 인연 마무리한 박용성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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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4년간의 대한체육회장 임기를 마친 박용성 회장은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는 의미로 “섭섭시원하다”라고 말했다. 최정동 기자

2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공원 내 대한체육회 회장실. 이날 임기 4년의 차기 회장을 뽑는 대한체육회 대의원 총회를 끝으로 4년 임기를 마친 박용성(73) 대한체육회장은 일찌감치 방 정리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집무실이 휑했다. “공수신퇴(功遂身退ㆍ임무를 다했으니 몸이 물러난다)”라며 지난 4일 연임 포기 의사를 밝힌 그는 이날 본지와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30여 년 체육계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후임은 김정행 대한유도회 회장 겸 용인대 총장이 선출됐다).

1982년 대한유도회 부회장으로 체육계에 입문한 그는 국제스포츠계 3관왕으로 일컬어지는 ?IOC위원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IF)인 국제유도연맹(IJF) 회장을 모두 역임했다. 이날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박 회장은 “경기를 끝낸 선수가 집으로 가는 건 당연하다”면서도 “30년 넘게 몸담은 체육계를 떠나려니 시원함보다 섭섭함이 커 ‘섭섭시원’하다”며 아쉬움을 비쳤다. 인터뷰에서 박 회장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2011년 7월 IOC총회에 이명박 대통령을 참석시키기 위해 통계학까지 동원했던 일화 등 못다 한 뒷얘기를 공개했다.

그가 임기를 시작한 2009년 2월 이후 대한민국 체육계는 ?2010년 밴쿠버에서 역대 겨울올림픽 최고 성적인 종합 5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2012 런던올림픽에서 원정 사상 최고인 종합 5위 달성 등 성과를 냈다. 지난 13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OC 집행위원회에선 런던올림픽 ‘독도 세리머니’로 IOC 동메달 수여가 유보됐던 박종우 축구 국가대표 선수의 동메달을 받아 왔고, 태권도를 올림픽 핵심 종목으로 잔류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용히 은퇴의 길을 택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둔 사실은 체육계 모두가 인정한다.

그의 연임 포기 결정에 IOC의 한 집행위원은 “YS Park이 그만둔다니 너무 아쉽다”고 집행위에서 공개 발언을 할 정도로 국내외 스포츠에서 그의 존재감은 컸다. 다음은 일문일답.

-갑작스레 연임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말들이 많다.
“지난해 런던올림픽 이후 단임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임덕이 싫어서 얘기를 안 한 것뿐이다. 연임에 대해 가족이 워낙 반대하기도 했고. 체육계 입문할 때만 해도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내가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하는 걷기 운동만 하니까(웃음).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와 함께 진천선수촌 건립 문제, 체육회관 건립 등 공약을 모두 지켰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 이루겠다고 한 것을 다 이뤘으니 행복하다.”

-런던올림픽에서 펜싱 신아람, 유도 조준호 선수 등 판정 시비로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거다. (제가) 얘기하는 방식에 좀 거친 부분이 있었던 건 인정하지만 국제 규범과 원칙에 맞춘 일처리 방식은 지금도 후회가 없다. 우리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억지가 통해야 스포츠외교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다.”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은.
“아무래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성공이다. 2007년 IOC위원직을 사퇴한 후 2009년 대한체육회장에 도전했던 것도 주도권을 쥐고 평창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원 없이 뛰었고 유치를 했다. 다들 힘을 합친 덕분이다.”

-유치 과정에서 비화가 많았을 텐데.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 IOC총회에) 이명박 대통령을 모시고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4월 말에 통계학 교수까지 동원해 IOC 표심을 체크했다. 2018년 겨울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총회였다. 약 110명의 IOC위원의 성향을 분석해 100% 평창을 지지하면 1점, 100% 다른 후보 도시를 지지하면 0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위원들은 0.3점과 0.5점 식으로 집계를 했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계산을 해도 50점이 넘더라. 극비 사항으로 이를 청와대에 보고했고,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청와대에서도 전폭적 지지를 해줬다. 우리는 2016년 여름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 IOC총회에서 미국이 실수한 점을 유념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가 참석했지만 지나친 경호로 인해 IOC위원들의 표심을 잃는 바람에 미국(시카고)이 브라질(리우데자네이루)에 개최권을 넘겨줘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아공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경호를 낮고 유연하게 하는 전략으로 IOC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통계 결과를 100% 확신할 수 있었나.
“막상 대통령이 가기로 결정되고 나니 겁이 나더라. 그래서 친한 IOC위원들과 관계자들을 만나 슬쩍 물었더니 ‘걱정 마라. 이번엔 너희가 1차 투표에서 이긴다’고 하더라. 속으론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그렇게 자신하다가 두 번이나 패했다’며 평창이 1차에서 이기면 100유로를 주겠다고 8명과 내기를 했다. 신권 100유로를 액자에 넣어 ‘가장 행복한 패배자로부터(From the happiest loser)’라는 사인과 함께 보냈다. 돈 잃고 기분 좋았던 적은 처음이다(웃음).”

태권도, 끊임없는 개혁만이 살길
-우려를 털고 태권도가 올림픽 핵심 종목으로 남는 데 성공했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번에 태권도가 핵심종목으로 남았다고 해서 영구 종목이 된 게 아니다. 2020년 올림픽까지만 남는다는 의미다. 매번 올림픽이 끝날 때마다 종목별로 평가를 하는 건 올림픽헌장에 명시된 IOC집행위원회의 의무다. 외국인 사무총장을 영입하는 등 개혁을 해서 살아남았지만 안심은 금물이다. 런던올림픽 이후 종목별 평가를 보면 퇴출이 결정된 레슬링보다 태권도가 뒤처진 항목이 있다. 집행위원회 투표 과정에서 3~5위를 결정하면서 14명 중 5명이 태권도가 퇴출돼야 한다고 표를 던졌다. ‘탈(脫)한국화’를 키워드로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국제스포츠로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

-레슬링 퇴출은 예상했나.
“퇴출 여부를 결정하는 IOC집행위원회에 레슬링 관계자들은 보이지도 않더라. 설마 레슬링을 퇴출시키겠느냐는 자만심 때문에 안일했던 거다. 레슬링이 위험하다는 분위기조차 읽지 못했다.”

-야구의 정식 종목 재진입 가능성은.
“2020년 올림픽 추가 후보 종목으로 야구와 가라테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잠정 결론이 났다. IOC 유력 인사에게 들은 애기다. 가라테는 유사 종목인 태권도가 살아났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아졌다. 야구는 메이저리그가 올림픽 기간 경기를 중단하는 타협안을 논의 중이라고 하는데, 우리 야구가 수준이 높으니 잘 되길 바란다.”

스포츠 외교에선 민족감정 앞세우지 말아야
-‘독도 세리머니’ 박종우 선수 건과 관련해 IOC 설득이 쉽지 않았을 텐데.
“IOC의 헌법 격인 올림픽헌장은 경기장에서의 모든 정치적 행위를 엄격히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박 선수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문구를 들었다고 해도 한국에 유리한 관광 홍보 메세지라고 IOC가 판단을 하면 징계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엄격하다. 징계위원회에서 미국인 제프리 존스 변호사를 통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적 내용이라는 걸 강조했다.”

-일본축구협회에 유감을 표명하는 서한을 보내 대일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족감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뿐 아니라 올림픽 개최국인 영국, 경기 상대국인 일본과 함께 IOCㆍ국제축구연맹(FIFA)ㆍ대한축구협회ㆍ일본올림픽위원회ㆍ일본축구협회 등이 얽힌 사안이니 국제적 방법으로 접근해야 했다. 따라서 IOC에 조언을 구했더니 일본이 박종우 선수를 처벌하자고 공식적으로 요구하면 IOC로서도 일처리가 어렵게 되니 먼저 일본 쪽을 접촉하라는 언질을 했다. 그래서 대한축구협회에 얘기해 일본 측에 편지를 보냈던 거다. 한데 편지를 작성한 축구협회 실무진에서 과도한 표현을 쓴 것이 문제였다. 급하게 편지를 쓰다 보니 내용이 장황해지면서 국민들 눈에는 좀 거북한 표현이 들어갔다.”

-IOC 징계위원회 분위기는.
“예상보다 우호적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독도는 우리 땅’ 피켓을 든 박 선수가 우리 축구협회 관계자로부터 피켓을 내려놓으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다. 징계위원들이 그 부분에서 정지를 시키고 ‘왜 놀라는 표정을 지었느냐’고 질문을 하더라. 의도적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을 소명할 기회를 준 거다.”

이젠 마음껏 사진 찍고 여행 다닐 것
-후임인 김정행 대한유도회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체육계 폭력 근절 원칙을 계속 이어갔으면 한다.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면서 내 임기 초반에 15%에 달했던 폭력 발생률이 7%대로 줄었다. 폭력 근절 세미나에 가면 ‘나도 맞으며 배웠으니 너도 맞으며 배워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두들겨 패서 따오는 메달은 필요 없다’는 원칙으로 스포츠인권센터를 만들었다. 이 무관용 원칙을 지속해주길 바란다. 또 하나, 체육계에 만연한 ‘아니면 말고’ 식의 투서 문화를 없애는 거다. 잘못이 밝혀지면 처벌을 하지만 근거 없는 음해로 밝혀질 경우 사법처리에 넘긴다는 원칙을 지켜 악습을 뿌리 뽑길 바란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이 성공리에 개최되기 위해 조언을 한다면.
“소통이 중요하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은 여러 면에서 훌륭했지만 언어 소통이 안 돼 많은 불편을 초래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선 적어도 1400명의 진행 요원이 필요하다. 외국어 인력을 지금부터 양성해야 한다. 또 스케이팅 종목뿐 아니라 여러 종목에서 골고루 메달이 나올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은퇴 후 계획은.
“이제 시간이 좀 많아졌으니 내 생활을 갖고 즐기려고 한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중앙대와 회사(두산중공업)도 매일 업무를 챙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좋아하는 야생화 사진도 마음껏 찍고 기차로 세계 여행도 다니려 한다. 앞으로 체육회 행사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을 거다. 대신 국제관계에 있어서 요청이 있다면 30년간 다져온 네트워크를 이용해 언제든 도울 생각이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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