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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도 ‘귀로 보는 ’영화로 만들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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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수연씨는 “JTBC가 방송 초기인데도 ‘무자식 상팔자’ 등 드라마 화면해설을 하고 있다”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무척 고맙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세 부부를 실은 승합차가 산 중턱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매끄럽게 달리고 있다. 희재는 지애가 덮어주는 담요를 계속 걷어내지만 따가운 눈총에 못 이기는 척 덮고, 희규는 새롬이 까주는 귤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운전대를 잡고 있다.”

 지난해 12월 9일 방영된 JTBC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 14회의 한 장면이다. 출연진의 대사와는 별도로 장면, 장면을 글로 풀어내 말로만 연기한 이른 바 ‘화면해설’이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의 다른 버전이다. 현재 활동 중인 화면해설 작가는 23명 남짓. 이들이 쓴 화면해설을 듣고 웃고 우는 이들이 있다. 바로 화면이나 현장 무대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 평일 낮시간 인기 영화나 드라마 재방송 때 TV에 따로 설치한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을 들으며 그 장면을 떠올린다.

 국내 1호 화면해설 작가 서수연(36)씨를 만났다. 영화 ‘타워’와 ‘이끼’,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 등의 화면·현장해설을 10년째 쓰고 있다. 경희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뒤 방송사 구성작가로 활동하던 서씨는 2001년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3년 KBS가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를 시작으로 낮 재방송 때 화면해설을 시작하자 구성작가 일을 그만뒀다. 화면해설에만 매달렸다.

 서씨는 자신이 해설할 드라마를 보기 전에 눈을 감고 꼭 먼저 듣는다. 들으면서 궁금한 장면을 체크한다. 그 장면은 해설을 쓸 때 더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시각장애인 입장이 돼봐야 좋은 해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은 엑스트라가 뭘 쳐서 ‘탁’ 소리가 나는 것마저 궁금해할 정도로 소리에 민감하다”며 “ 청취자의 궁금증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하우”라고 했다.

 서씨는 국내 화면해설계에선 베테랑에 속하지만 “여전히 화면해설이 어렵다”고 말한다. 가장 힘든 건 최근에 자주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서씨는 “대규모 전투 신이나 웅장한 특수효과 장면 해설을 쓸 땐 짧은 시간에 엄청난 정보를 담아야 하는데 문장의 취사선택에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멜로드라마에서 주인공 얼굴만 계속 나올 땐 쓸 말이 없어 난처할 때도 있단다. 드라마의 다양한 소재 탓에 애를 먹기도 한다. 그는 “외과의사가 수술용 칼을 쫙 펼치는 장면에서는 칼의 크기와 이름도 알려줘야 하는데 대본에도 그런 정보가 없다. 일일이 찾아보고 해설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시각장애인용 콘텐트는 대부분 서울 공덕동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www.kbumac.or.kr)를 거친다. 서씨도 주로 여기서 일을 한다. 방송사에서 접근센터로 작품을 넘기면 작가가 화면해설을 쓰고 성우가 녹음한 뒤 방송국에서 송출되는 방식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양한 화면해설 콘텐트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

 서씨는 최근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서 주관하는 ‘착한 도서관’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 일반인과 이 회사 임직원 200여 명이 화면해설영화와 오디오북을 만든다. “시각장애인들이 좋다고 하면 밤새워 일한 고달픔이 싹 잊혀진다”는 그는 “홈쇼핑이나 미술품 해설 등에도 화면해설이 응용될 수 있는 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글=한영익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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