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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선을 넘어온 「자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주인공「니콜라이·이브젠예비치·코크로프는 1954년 2월 소련간첩생활을 청산하고 자유를 찾아 서독주둔미국점령군정보국에 망명을 요청했다. 「코크로프」는 「프랑크푸르트」주간지 「포재프」의 기자 자격으로 내한하여 서울국제방송국에서 몇 년간 대소련방송을 맡아본 일도 있다. <편집자주>
이야기의 실마리는 1954년 이른봄. 전 주한미대사관이었던 「월터·다울링」씨가 주독연합군미국변무관대리의 자격으로 소련변무관에게 항의서를 발송함으로써 시작된다.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아직도 그의 이름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다울링」씨는 그 항의서에서 『정치망명을 청해온 소련간첩「코크로프」는 자유의사로 정치망명과 그의 신분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해왔을 뿐 아니라 인도적 정신에 호소하여 현재「모스크바」「크리보미콜키」가5「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아내와 아들을 서독에 보내주도록 소련정부와 교섭해 줄 것을 미국정부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소련의 MVD(비밀경찰)가 벌써 「코크로프」에 대한 보복행동에 나섰다고 발표하는 글에서 「다울링」씨는『미국정보부에서 일하던 전향한 소련계 의사가 서백림에서 동독으로 납치되어갔는데 이 의사는 「코크로프」가 소련MVD로부터 암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대상자 「오코로비치」의 유일무이의 친구였다』라고 밝히고 『1954년4월15일이 소련태생의사 「트르쉐노비치」의 납치야말로 소련정부에 의한 무자비하고도 비인도적인 처사』라고 엄중항의했던 것이다.
정치망명을 해온 소련간첩 「코크로프」의 폭로사실은 그가 전향한지 근 10년동안이나 신비에 싸여 있다가 요새야 그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파란곡절 많은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독의 공업도시「프랑크푸르트」시의 공장굴뚝을 연기도 가라앉고 해사 서산에 져서 어둑어둑해질 무렵, 거리에 키도 그리 크지 않고 무테안경을 낀 사람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삐 지나가던 사람들중에는 그가 「크렘린」에서 암살하는 고등훈련을 받은 소련간첩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니콜라이·이브젠예비치·코크로프」대위는 소련MVD의 암살국9과의 지령을 받고 암살을 수행하려던 찰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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