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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투혼|처칠에 관한 회관(끝)-주치의「찰즈·모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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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5년 1월22일=(런던에서)
수상은 각의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이렇게 될줄은 몰랐어…』『저까지도 정치라는 것이 싫어졌어요』라고 나는 답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나쁜것은 아니지만…』 수상은 말했다. 「맥밀란」의 권고에 상당히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55년 4월6일=(런던에서)
「윈스턴」이 「다우닝」가 10번지의 수상관저를 뗘날 날이왔다. 그에겐 모든것이 끝난것 같았다.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는 사위「솜즈」에게 『한번 더 각의실을 보고싶다』고 말했다. 어두워서 전등을 켰다. 「윈스턴」은 한순간 감개깊은 듯이 바라보면서 방을뗘났다.
▲57년4월10일(하이드파크게이트=처칠의 사저에서 83세)
「앨런브루크」백이 대전 회고록을 출판하여 거기서「처칠」을 공격하고 있는데에 대해 「처칠」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별로 개의하지 않아요. 우리는 비판에는 만성이 되었어요. 그런데「윈스턴」이 차차 사기가 가까워 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갑자기 연극을 보고 싶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 시작해서요. 대사도 듣지 못하면서요.』『마지막으로 한번 봐두고 싶다는 심경일까요?』 내가 이렇게 말하니 부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천재적 군인도 아니고, 천성의행정가도 아니었으나, 다만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도 비상한 정열을 기울이는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승리라는 것 이었다.
이러한 그의 단순한 성격은 평상시엔 나타나지 않았던가? 내가 본 바로는 그는 평상시에는 사람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성질이었다. 그야말로 비상시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가 있었음으로 해서 영국민은 「히틀러」에 대해 철저히 저항하려는 의지를 불태웠던 것이다. 영국민은 진상을 있는 그대로 듣고 싶어했고, 오히려 나쁜 소식이라도 듣고싶어하는 기분이었다.
「윈스턴」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이를 내어던지 듯이 국민에게 진상을 내어던졌다. 「윈스턴」은 당초「스탈린」에게 회유될 것 같았으나 누구보다도 먼저 소련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는「루스벨트」에게선 찾을수 없는 점이었다.
「핼리팩스」 주미 영대사(전시중)가 지적한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윈스턴」이 자유세계의 지도자로서의 신뢰를 독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투를 하고있었다.
노쇠가 점점 심해져서부터 「윈스턴」은 혼자 방치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내가 휴가를 떠나려고 하면 「윈스턴」은 『너무 오래 있지말고 곧 돌아와주…』하며 나의 손을 잡곤했다.
65년 1월초부터 그의 용태는 악화했다. 병상을 발표 할 때마다 영국민에게 「윈스턴」의 사기가 가까와 왔음을 각오시켜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떻게 발표해야 할지 망설였다.
「윈스턴」은 14일간이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나 1월23일 밤부터 사기가 가까워 온기미가 짙어졌다.
「윈스턴」의 호흡은 얕고 괴로와지더니 1월24일 아침8시 마침내 멎었다. 곁에있던 딸「메리」는 나를 쳐다보았다. 향년 91세였다. <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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