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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방女 동경하던 동네, 어딘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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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4일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일본인가옥거리에서 구룡포초교 아이들이 일일교사로 나선 향토시인 권선희(48·왼쪽)씨로부터 지역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구룡포=프리랜서 공정식]

“그럼 이쪽도 일본 사람 살던 건물인교?” 4일 늦은 오후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일본인가옥거리. 구룡포초교 4∼6학년 학생 10여 명이 세월의 더께가 앉은 한 건물 앞에 섰다.

 “해방 전까진 일본인이 운영하던 여관이었다 아이가. 지금은 고쳐서 찻집으로 안 쓰나.” 학교 교사와 함께 방과후 학습을 나왔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교사’를 “아지매”라고 불렀다. 지역 시인 권선희(48·여)씨였다. 구룡포 주민 자치조직인 ‘아동복지위원회’가 마련한 ‘우리 동네 역사탐방’에 일일교사로 나선 것이다.

 전교생 220명인 구룡포초 아이들에게 지역의 어지간한 어른들은 모두 ‘선생님’이다. 아이들 축구 코치는 구룡포 안에서 공 잘 차기로 소문난 중국음식점 김원연(56) 사장이다. 김 사장은 매주 토요일 학교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한 뒤 자기 식당에서 짜장면을 쏜다. 읍내 목욕탕은 아이들에게 공짜로 목욕을 시켜 준다. 학교 앞에서 보습학원을 하는 김신희(34·여) 원장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 서너 명을 공짜로 가르쳐 준다. 이 같은 재능기부 방식으로 아이들 품앗이 교육에 참여하는 이곳 주민은 200명에 이른다.

 주민들이 품앗이 교육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2008년 8월. “이대로 우리 아이들을 방치해선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에서였다. 과메기 주산지인 구룡포는 일제시대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때 초등학교는 구룡포초를 포함해 4개였고, 구룡포초 학생만 해도 3000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농(離農) 열풍에 젊은이들이 타지로 떠나면서 3만 명을 넘던 구룡포 읍민은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인구 중 24%가 65세 이상 노인이다. 어촌 특성상 어른 손길이 가지 않는 아이가 많아졌다. 과메기 철인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진 일손이 달려 더욱 심했다.

 “아이들 꿈까지 빈곤해지는 게 젤로 마음 아픕디다. 다방아가씨나 깡패가 꿈이라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 다해뿌랬지.” 구룡포이장협의회장 김정탁(47)씨 얘기다. 그는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자고 발 벗고 나서게 됐다” 고 회고했다.

 4년 반 전,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동복지위원회’라는 주민 자치조직이었다. 중국집 김 사장 등이 솔선수범을 보이면서 품앗이교육에 참여하는 주민이 자연스레 늘었다. 미용실과 피아노·태권도 학원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비용을 절반만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턴 아이들을 역사유적지에 데리고 다니는 문화체험 활동도 시작했다. 주민들의 이런 노력을 지켜본 초록우산어린이재단(회장 이제훈)도 힘을 보탰다. 재단과 주민들은 지난해 11월 어린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마을 어른들의 관심은 아이들을 바꿔놓았다. 수줍음이 많던 박수진(12·5학년)양은 오케스트라 단장을 맡을 만큼 씩씩해졌다. 수진양은 “동네 아저씨·아줌마들과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며 “3, 4학년 때 전 과목 평균 점수가 50점밖에 안 됐는데 지난 연말엔 80점이 넘었다”고 자랑했다. 구룡포초는 2010년 영어 8.5% 등 기초미달 학생 비율이 높았으나 지난해엔 국어·영어·수학 전 과목에서 기초미달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아동복지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황보관헌(55·구룡포 수산물조합장)씨는 아이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알라들이 어른을 봐도 본 체 만 체했는데 이제는 멀리부터 달려와가 인사한다 아인교. 이젠 구룡포선 주민 모두가 아이들 아비고, 애미나 다름없습니더.”

구룡포=윤석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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