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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데모·주먹까지 한 몫 울분 눌러 현실영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애국자>
해방은 수많은 애국자를 낳았다. 배를 쑥 내밀고 모두가 애국자라고 했다.
해방직후 중국이나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은 「독립투사」 아니면 「장군」, 미국에서 돌아오면 「박사」나 「애국자」 모두 「우국지사」라 내세웠다. 「하와이」서 「세탁소」를 하다왔건 중국에서 「아편장사」를 했건 간에 일단은 애국자로 통했다. 어찌 그뿐이랴! 옥문이 열려 풀려 나온 애국지사 이상으로 이상한 전력을 가진 「애국지사」가 들끓고 야단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무상한 것, 인심과 더불어 애국자도 변했다.
6·25 당시에는 이른바 「도강파」가 아니면 애국자범주에 들지 못했다.
젊은 병사가 피투성이로 길바닥에 쓰러져있어도 본체만체, 자동차를 타고 일로 남행만 하면 애국자였다. 「반공」을 파는 정치인, 주먹만 냅다 휘두르는 「반공주의자」가 단단히 한몫 봤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고 의젓하게 국회에서 발언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테러」가 애국이요, 불법이 행동강령이었지만 「애국」의 기치는 항시 높이 들고 있었다. 4·19를 만나고는 모두 줄행랑. 이 때는 또 「데모」학생이 주권자에 애국자. 학생들을 「지도합네…」하던 정치인도 덩달아 춤추었다.
이것도 1년 남짓. 5·16의 철퇴를 맞고는 이른바 「때묻지 않은 인사」에게 「애국자」의 「바통」을 넘겼다. 「데모」를 일삼던 학생들이 「데모」가 애국이 아니라는 현실재판을 받고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애국자의 변모는 선진 영국도 마찬가지. 18세기 영국에서는 『치안을 방해하고 폭동을 교사하는, 정부의 방해자』가 한때 애국자로 불렸다. 어쨌든 우리는 애국자가 많은 나라에서 산다는 복됨을 언제쯤 누리게 될는지….

<학생기질>
『우리도 「데모」하자』
『도서관에 박힌 놈들을 불러내라』 부정에 항거하던 4·19의 학생들은 창백한 지성이 역겨웠다.
자학이 아니라 울분의 폭발이라 했다.
이는 어느 일면으로는 해방 당시의 학생모습과 상통한다. 해방직후는 교수도 교사도 없는 혼란의 극. 거기다가 공산주의마저 날뛰어 「이즘」의 치열한 투쟁이 학생들을 반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공부는 고사하고 그들 자신이 「엘리트」로 정치하는 기분이었다.
학생들이 눈을 바로 뜬 계기는 6·25. 『붉은 마수를 막아야겠다』 『조국을 지켜야겠다』는 자각이 샘솟았다. 그러던 중 4·19의 과제가 또 한번 학생들에게 시련을 주었다. 너무도 벅찬 짐이 학생들을 들뜨게 했다. 자만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했다.
일제 때는 학생의 희소가치 때문에 간혹 특권시 되기도 했다. 다소 잘못이 있어도 사회는 귀엽게 봐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폐교도 불사하는 서슬이었다. 이 통에 호연지기의 싹마저 꺾였다 할까, 아무튼 지금은 위축상태.
너무도 위축되어 낭만이 없다. 해방직후에는 혼란 속에서나마 낭만에 넘쳐있었다. 멋대로 놀아볼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사회가 용납 않는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땐 그러지 않았는데…』 선배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해도 지금의 학생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몰랐던 벽에 부딪쳐있다.
우선 젊음을 발산할 길이 없다. 지금의 학생 「그룹」활동은 장애투성이. 『공부만 하라』했지 생활을 값있게 영위하자는 지도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시간이 갈수록 학생기질이 현실에 더 영합되고 모두 착실한 현실주의자가 됐다.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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