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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정 국회 준비 동의 한돌|「졸속」심의 대가|난제 속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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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강행 돌파」와 「극한 저지」가 날카롭게 맞선 가운데 한·일 협정 비준 동의 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가결 된지 1년-정치가 망각의 선수라고 하지만 그 정치도 8·14비준 파동을 망각의 피안에 묻어 버리기에 일본은 너무도 가까운 이웃이며 파동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기에 시간은 너무 일렀는지도 모른다. 한·일 수교로 국가 사직이 당장에 흔들릴 것같던 야당의 주장은 「수교」라는 기정사실을 기정사실로써 받아들여야 하게 되었지만 「영광의 시발점」이라고 자찬했던 정부·여당도 북괴 기술자의 일본 입국 분규와 대 북괴 「플랜트」수출로 대표되는 「시련」앞에 초조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하겠다.
야당은 66년 3월 2일의 「한·일 회담 중지 결의안」을 고비로 모처럼 당론의 통일을 기할 수 있었으나 불과 반년도 지나지 못하고 일부 의원의 의원직 사퇴 강행과 잔여 의원의 명분 없는 원내 복귀로 야당의 결정적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파동의 와중에서 의원직을 내던진 윤제술씨는 『굴욕적 협정은 협정 그 자체에 그치는 게 아니고 그 결과가 예견되기 때문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씨는 『1년이 지난 오늘까지의 경과를 보면 우리의 예고가 들어맞았다고 그것 봐라 하기에는 우리의 우국충정이 너무도 침통하다』고 말하면서 『북괴 기술자의 일본 입국과 대 북괴 「플랜트」수출 문제로 내외가 시끄럽지만 이것은 한낱 표면에 나온 「면종」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더 무서운 「내종」이 속으로 곪아 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가 값싸게 판 청구권 사용을 오늘날까지 고의로 지연시키고 건조된 근대식 어선도 일부러 성어기를 피해 보내지 않고 있으며 재일 교포 수를 줄이기 위한 소위 「캘커타」협정의 연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한 윤씨는 『도대체 상업 국가와 결혼하고 조약 정신이니 도의니를 찾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한탄이다.
윤씨와 같이 의원직을 사퇴한 전 외무부장관 정일형씨도 한·일간의 장래에 여전히 비판적이다. 한·일 두 나라가 수교를 해야 한다는 게 역사적 필연이라면 백 번이라도 인정하지만 그 방법과 자세가 「졸속」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평화선 철폐에 따른 국방선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으로 이들의 법적 지위는 오히려 저하되어 일본 귀화자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북괴 기술자 문제로 일어난 한·일 분규를 심상치 않게 보면서 이 분규가 끝내는 「두개의 한국」으로 이끌릴 소지가 될 것을 우려했다.
민중당도 한·일 조약에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에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기정 화한 「사실」을 수용하는 자세에 있어 신한당과 차이가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한·일 문제로 인해 이별을 고한 두 쪽의, 그 어느 쪽도 이제는 엄연한 「기정사실」을 토대로 자기 세력의 구축에 몰입하고 있음이 「현실」이기도 하다.
북괴 기술자 일본 입국 문제로 생긴 「분규」는 마침내 국회 외무위로 하여금 『우리는 오랜 구원을 풀고 자유 우방으로서의 국교를 정상화한 오늘날까지 일본이 전전의 제국주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대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금할 수 없다』는 요지의 「당면한 한·일 사태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정부는 한·일 조약과 국민 여론에 비추어 미봉적이었던 태도를 지양하고 확고한 정책을 견지하여 한·일간의 기본 관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자주적인 처리를 단행하라』고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여·야가 함께 채택한 이 결의안에 대해 윤제술씨는 『언제라고 정부가 국회 건의를 들어준 일이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번 국회 건의도 건의에만 그칠 것이고 정부의 조치는 결국 협정 당시의 자세로 환원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의 긍정에는 힘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이웃』이 이상 더 원수로 지낼 수 없게 했으며 팽창하는 중공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두 나라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대전제였다는 「필연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다. 야당의 「극렬한 반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인 「성질상」의 반대는 아니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한 정권을 염두에 둔 「정치 논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리하게 내리민 강행이 「졸속」이란 비난을 면치 못하게 했음을 이들도 인정하고 있다. 협정 체결 불과 반년에 예기했건 뜻밖이건 너무도 많은 난제의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선린」 「우호」가 제아무리 강조된다 해도 난제 해결을 위해 일본의 「성의」에만 의존 할 수 없다는 게 오늘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경 분리 원칙」을 북괴에도 적용하려는 저의를 담은 북괴 기술자 입국과 대 북괴 「플랜트」 수출이 기본 조약 정신의 위배인 것은 차치 하고라도 전관수역 침범과 추적권 시비 불균형 무역의 강요 교포 북송 협정 연장과 화태교포 송환에 대한 무성의 등으로 두드러지는 재일 교포에 대한 이중정책 청구권 자금 사용에 대한 비협조 등등…. 여기에 시세보다 비싸게 팔겠다는 일본 업계의 담합행위까지 곁들여 있어 황금 어장과 반세기 질곡의 대가를 날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조차 나돌고 있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가 일방통행이 아닌 만큼 누가 해도 이 이상의 방안이 없었으며 적어도 교섭이 낙착될 수 있는 근사치는 찾아낸 것으로 본다』고 협정을 맡았던 당국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들은 한·일 수교의 이해 득실을 놓고 순전히 경제면만을 생각해도 「실」보다는 「득」이 더 많았다는 풀이를 피력하고 있다.
한국이 처하고 있는 시대성에 비추어 중공·북괴와 맞서고 있는 터에 일본마저 적대 관계로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며 소극적이었던 자세에서 적극적 몸가짐으로 방향을 바꾼 「장래를 위한 포석」에 더 역점이 있는 것이지, 청구권이 한·일 수교의 단층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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