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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간첩 조르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붉은 「스파그 단의 거괴로서 일제를 휩쓴 「리히아르트·조르개」가 동경구치소에서 「오자끼·호쓰미」(미기수빈)와 함께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1944년11월7일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1964년. 소련은 「조르게」에게 「소련영웅」의 칭호를 추서했다.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짜이룽」 지특파원이란 직함과 함께 「나찌」당원증을 입수, 33년 동경으로 뗘날때 그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만주사번이후의 일의대소정책, ②소련을 대상으로한 일륙공군의 동향 ③「히틀러」정권 성립후의 일·독 관계연구 ④일의 대중정책 경보 ⑤일의대미·영정책동향 ⑥일의 대내외정책 결정에서의 군부의역할 ⑦일의 중공업과 전시경제확장의 정보. 「조르게」는 동경 「아사부」에 주거룰 정하고 특파원으로서의 일율 시작했다.
보조원으로서는 신문기자출신인 「오자끼」와 「오로」독일대사의 협력울 얻어, 놀라울만큼 정확한 정보를 착착 입수했다.
태평양전쟁 직전 「조르게」일당의 「스파이」활동은 종말을 고했다. 그사이 8년간에 훔친정보는 일은 물론 독일의정치·외교·군사에 걸친 국가최고기밀의 거의전부었다.
주요한 것만 열거하면, 36년 2·26사건의 시작, 일독방공협정, 일화사변의 발생, 장고보사건,「류시코프」 대장월경사건, 왕조명공작, 「노몬한」사건, 독·소 개전과 일의 동향, 일의 남침춘비, 미·일교섭과일의 진의, 군용자원관계 등 그것은 전시일본의 중요한 움직임은 남김없이 부각한 전대미문의 완벽한 활동의 압권이었다. 그중 가장 이채로운 결정타는 일본은 남진계획으로 절대로 소련은 공격하지 않을것이란 보고였다.
일본이 대소공격은 않고 남방으로 진출, 불인에 진주하기로 결정했다고 「조르세」가 보고한 것은 개전 5개월전인 41년7월2일 어전회의 직후의 일이었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독군의 항복올 초래, 독·소전의 분기점이 된것은 「조르게」의 이 귀중한 정보 덕택이었다.
이보다 전에 삼륵그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정보를 입수하려다 실패한 것이 검거의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기름저장량으로 본 일본의 전쟁 수행 눙력의 판단은 소름이 끼칠만콤 정확한 것으로 이미 「크렘린」에 알려져 있었다.·
『이제 일본에서의 나의 일은 끝났어. 슐슬 돌아갈 준비라도 할까』「조 133호 독방의 잠을르게」는 「오자끼」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맨 어미 사직의 손이 무사람의 신변에 뻗쳐, 「오자끼」는 명에 따라 지금부터 당신 10월l5일, 「조르게] 는 사홀후 「스탈린그라드」 의격전중 검거되었다.
「마이스너」 저 「스파이·조르게」전은 이「스파이」왕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44년11월7일 동경구치소133호 독방의 잠을 쇠의 찰칵 소리와 함께 소장이 엄숙하게 말했다. 「조르게박사, 사법대신의 명에마라 지금부터 당신의 사형올 집행할 것을 전합니다.」 「조르게」는 아무반응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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