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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이, 손이, 온몸이 떠는 전율의 3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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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호 27면

‘쇼팽의 초상(미완성)’ 외젠 들라크루아

3분여의 시간, 그 시간이 내게 중요했다. 3분은 하나의 감흥의 세계를 음미하고 반추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무슨 얘긴고 하니 쇼팽의 유일한 첼로 소나타(cello sonata in G minor. Op.65) 가운데 3악장 라르고의 러닝 타임을 말한다. 네 개 악장으로 된 이 소나타에서 가장 짧은 악장인 라르고는 이 소나타의 존재감을 알리는 정점이자 얼굴이다. ‘아름답고도 슬프다’. 이 라르고를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유명·무명의 첼로 주자들이 3분여의 음악에 매달려 저마다 솜씨를 겨루고 있다. 그만큼 매력과 흡인력은 공인된 셈이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나탈리아 구트만의 쇼팽 첼로 소나타

영화에 주제가가 있듯이 여행에도 주제가가 따른다고 믿고 있다. 내 경우 거의 예외 없이 여행을 표상하고 묘사하는 주제곡이 따른다. 어떤 때는 저절로 생겨나고, 어떤 때는 스스로 여행길에서 찾아내게 된다. 영화에 주제가가 없다면, 가령 ‘졸업’에서 ‘스카보로의 추억’이 없다면, ‘의사 지바고’에서 ‘라라의 테마’가 없다면 이 영화들은 건조한 스토리의 나열에 그쳤을 것이다. 음악이 분위기와 색채를 만들어 낸다. 넓게 보면 삶도 그렇다. 여행은 삶의 한 축제다. 이 축제에 음악이 빠지면 그것은 무미건조하고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피곤한 여정에 그칠 가능성이 많다.

지난해 8월, 나는 러시아 라잔 주 가브리노에 잠들어 있는 니나의 무덤에 성묘차 다녀왔다. 7년 전 러시아 여행 때 내게 따뜻한 몇 끼 식사, 특히 맛있는 삶은 계란과 소박하고 다정한 우정을 베풀어 준 전형적인 러시아 농가 할머니다. 니나의 부음을 듣고 그녀를 찾아간다고 마음먹은 지 몇 해 만에 겨우 기회를 얻어 러시아로 갔다. 날씨 변덕으로 갑자기 추워져 모스크바에서 라잔까지 수백㎞ 차를 타고 가는 길이 쉽지가 않았다. 니나를 생각하며 처음에는 칼 다비도프의 짧은 첼로곡 ‘무언의 로망스’를 떠올렸다. 전원풍의 쓸쓸한 이 곡의 선율이 니나를 찾아가는 길에 내내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우연히 쇼팽의 라르고를 듣고 주제가를 바꿔버렸다. 바로 이 선율이야말로 니나를 찾아가던 절실하고 애달픈 나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것이다.

성묘길에 만난 러시아 시골 여인네들은 하나같이 내가 니나를 찾아온 얘기에 감동하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했다. “이 사람이 글쎄 멀리 서울에서 니나를 찾아 이 바쁜 시간에 여기까지 왔지 뭡니까?” 동행자인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가 열심히 설명하자, 꽃가게 주인인 중년 여성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 큰 눈으로 마치 성자를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니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러시아의 시골 할머니를 잊지 않고 찾아준 내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는 성호를 그으며 나의 무사귀환을 빌어주었다. 귀로에서 만난 흰 버섯을 파는 할머니들도 아나톨리의 설명을 듣고 나를 바라보며 몇 차례나 성호를 그었다. 나는 한 이방인의 진실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그 여인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눈길에 되레 감동 받았다.

슬프고 아름다운 곡, 쇼팽의 라르고 - 이 3분여의 시간을 누가 가장 섬세하게 그려낼까? 20여 명의 유명 무명 주자들 연주를 들었지만 뭔가 허전했다. 활을 쥔 손의 힘의 밸런스를 그런대로 잘 조절해 비슷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은 누구나 다 하고 있다. 그러나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탐색을 하던 중에 나탈리아 구트만(작은 사진)과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손을 맞춘 연주를 듣고 거기서 탐색을 멈췄다. ‘바로 이거다’란 말이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이 들어 몸이 약간 비대해진 구트만은 첼로를 껴안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 눈앞의 청중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볼품 없는 자세로 오직 연주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의 선율은 시작부터 미세한 떨림이 계속된다. 그의 활이 떨고 손이 떨고 온몸이 떨고 있다. 이 곡의 비애와 쓸쓸한 가락에 들린 사람만이 이 떨림의 선율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 떨림이 내 마음으로 전이돼 나도 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꼼짝 못하고 구트만의 떨림에 흡수돼 버렸다. 흔히 신들린다고 하는데 그 곡에 들리지 않으면 이런 연주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주자 가운데 굳이 말하면 피아티고르스키나 자크린 뒤프레 정도만이 겨우 비슷하게 그 감흥을 그려낸다. 그러나 구트만은 이 라르고에 관한한 완전하다. 이 3분의 라르고를 들으니 구트만이 리히터나 올레그 카간 같은 거물들과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삼중주’를 비롯해 쇼스타코비치, 라벨 등의 곡을 계속 협연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렇다고 구트만이 만능선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슈만, 드보르자크 등 색채가 강하거나 낭만적 작품에는 강한 면을 보여주지만 바흐 곡에는 들리지 못한 것 같다. 그의 바흐 ‘무반주첼로모음곡’ 연주는 지극히 평범해 약간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한다. 바흐와 잘 사귀지 못한 주자가 구트만 한 사람만은 아니니 그것을 탓할 수는 없고, 연주자가 반드시 만능선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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