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판단 뒤집은 법원 “최태원 회장이 횡령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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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무죄 선고를 받은 최재원 SK그룹 부회장이 탄 차량이 직원들에 둘러싸인 채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박종근 기자]

“피고인의 범행은 기업 사유화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표출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크다.” 31일 최태원(53) SK 회장을 법정구속한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이원범)가 판결문에 적시한 표현이다. 대기업 총수인 최 회장이 여러 유력기업(계열사)의 재산을 단기간에, 대량으로, 개인 용도로 횡령한 것이라서 죄가 무겁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회사 돈 604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로 불구속 기소된 최 회장에게 465억원 횡령 혐의를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1700억원대 횡령, 200억원대 배임 혐의로 구속기소된 동생 최재원(50) 수석부회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형과 동생의 처지가 엇갈렸다. 또 이들을 도운 혐의로 기소된 김준홍(48)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 장진원(54) SK 전무에겐 각각 징역 3년6월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 회장을 횡령 사건의 ‘몸통’이라고 봤다. 최 회장의 지시로 SK 계열사인 SK텔레콤·SK C&C로부터 펀드 출자금 명목으로 끌어모은 465억원이 김 대표를 통해 선물·옵션 투자하는 데 쓰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구체적으로 “돈이 필요했던 최 회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돈을 빌리기 어렵게 되자 회사 돈을 횡령해 선물에 투자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 과정에서 별다른 내부 검토 없이 일사불란하게 돈이 흘러간 점에 대해 “최 회장의 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최 회장이 장 전무와 공모해 2006~2010년 SK 계열사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과다 지급한 뒤 돌려받는 방식으로 139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최 부회장에 대해선 “최 회장의 지시에 따라 실행에 옮겼을 뿐 직접 투자하지 않았다”고 보고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기소된 혐의 가운데 일부만 유죄로 판단하고서도 재판부가 징역 4년의 중형을 선고한 이유는 뭘까. 일단 공판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이 당초 검찰 조사 때와는 달리 최 회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김 전 대표가 “선물투자 때 최 회장의 지시가 없었다”고 한 것이나, 최 부회장이 “최 회장과는 관계없이 정상적으로 투자한 것이었다”고 말한 것 등에 대해서다. “선대회장의 유산을 대부분 내가 물려받아 동생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에 빌려준 돈”이란 최 회장의 진술도 거짓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최 회장이 공범으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변명으로 일관했다”며 이를 불리한 양형사유로 삼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SK그룹 계열사에 대한 배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복권(2008년 8·15)이 이뤄진 후 불과 3개월 정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사건을 저지른 점도 들었다.

 이번 법원 판단은 당초 검찰의 기소 내용과도 차이가 있다. 검찰은 지난해 1월 최 회장을 불구속기소하고, 최 부회장을 구속기소했다. 지난해 11월 결심 공판에서도 최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최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각각 구형했다. 검찰은 구형 때 “비슷한 사건에서 다른 대기업 오너들도 9가지 조건 중 5가지만 충족하면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최 회장은 9가지 모두에 해당돼 반드시 실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권고 형량(징역 4~7년)의 하한인 징역 4년을 구형해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최 회장의 구형량을 낮췄다”는 설이 돌았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팀이 당초 정한 구형량은 최 회장이 최 부회장보다 더 높았다”고 전했다. 검찰에선 ‘봐주기 구형’이 역효과를 냈다는 얘기도 나왔다.

글=김기환·심새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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