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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우라늄」을 찾아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중공의 급속한 성장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더 우 기나 일단 원폭을 소유하게된 중공은 어느 날에 가서는 반드시 소련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스탈린」이 중공의 핵 개발을 순순히 도와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중공의 핵 개발을 억제하여 언제까지나 소련의 후견아래 두고 싶었던 것이 「스탈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우선 문제의 원자물리학자 전삼강을 모택동에게서 뺏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거절했다. 「스탈린」이 중공의 핵 개발을 억제하기 위해 쓴 다음 방법은 신강성에 관한 중·소 협정이다. 당시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던 이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이 지역에 있는 비금속과 희귀금속의 공동발굴과 사용을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1950년 3월27일 조인되었다.
신강성은 중공에서 「우라늄」광이 가장 풍부하게 매장된 곳이었고 소련이 목표로 한 것은 바로 이「우라늄」광이었다.
소련군을 철수시기는 시켜야겠고 또 스스로의 기술로는 도저히 이 지역의 광산을 개발할 수 없었던 중공은 울며 겨자 먹기로 협정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최초의 소련원자폭탄제조를 일찍이 영국에서 수학한 「카피차」에게 맡겼던 것이다. 모택동도 이 예를 따라 「프랑스」의 「졸리오·퀴리」 연구소에서 일했던 전삼강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이렇게 해서 전은 중공원폭제조의 전 책임을 지게 되었고, 「우라늄」광의 탐색에서 폭탄의 기술적인 제작에 이르기까지를 맡아야 했다.
어려운 탐색작업 끝에 전삼강의 지질조사단은 방대한 보고서를 작성, 북평으로 돌아왔다. 당시 모택동은 한국전을 직접 감독하기 위해 공산당정치국을 심양으로 옮겨 직접 북괴와 중공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급거 북평에 도착한 모택동은 실로 깜짝 놀랐다. 전이 내놓은 보고서에는 중공지도자들이 미처 상상도 못한 만큼 풍부한 지하자원이 숨겨져 있었으며 수폭제조 물질인 「리튬」 광맥이 신강성지도위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당시 소련령 「카자크스탄」과 신강사이에 있는 「준가리」 지방에는 소련기술자들이 철로를 부설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이들 기술자들은 「우이기르」 「카자크」 「키르키즈」족들의 반란에서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1950년의 협정에 따라 「스탈린」은 이 지역에서 소련군을 철수하기로 동의했으나 도무지 그럴 기색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소국경선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보려고 까지 하는 등 즉 소련군인들은 중공경비병에게 술을 먹이고서 국경선 표식을 중공령 깊숙이 옮겨놓은 일이 발생했다. 여기에 대처해 중공은 똑같은 방법을 써서 국경선 표식을 원위치로 옮겨놓는 등 이 지역을 놓고 중공과 소련의 암투는 마치 일막의 전쟁극을 방불케 해다. 이러는 동안 한국전은 차츰 공산군에 불리해져 갔다. 소련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뜻이 없어졌고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제의할 생각이었다. 반면 중공은 수많은 군대를 잃었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던 까닭으로 쉽게 불리한 입장에서 휴전을 교섭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중공을 달래기 위해 특파된 사람이 노련한 「미코얀」, 그는 모와 협상을 시작했다. 중공은 휴전에 동의하는 대신, 소련에 미군의 공군력으로부터 중공을 방어할 수 있고 또 유리한 휴전협상을 위해 꼭 필요했던 3백 내지 5백대의 「미그」전투기를 요구했다.
「미코얀」은 재빨리 알아차렸다. 어차피 주는 것은 주는 것이고 이를 계기로 무언지 실속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소련군사원조 대신 신강성의 광산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지금까지 공동으로 발굴해 50%씩 갈라서 차지하던 「우라늄」 및 기타 방사선물질을 이번에는 25%만 중공에 넘겨주고 나머지는 소련이 차지하자는 것이다.
「스탈린」은 죽고 「크렘린」은 권력을 위한 내부분열을 일으켰다. <차회 소를 배신한 「후크」박사>불「피가로」지서-미셀·보리기 [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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