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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의 밀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내일부터 열리는 국제회의에 대비한 조처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시가의 간판을 단속하는 모양이다. 간판저리를 뒤늦게나마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 간판이 제일 요란스럽고, 때로는 행인에게 일종의 위압감마저 주는 간판의 밀림 셋을 대라면 서울·동경·「홍콩」을 곱아야 한다. 일찍 개명한 나라일수록 간판을 일찍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서양서 간판이 가장 성했던 때는 16∼17세기. 그때부터 간판의 크기가 자꾸만 커져서 도로를 무섭게 침식해 갔다.
그래서 「런던」과 「파리」에선 18세기 중엽에 간판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간판을 벽에 밀착시키게 했다. 이 점에서는 일본도 별 수 없는 후진국 -1949년에 비로소 간판을 규제하는 법이 생겨서 단속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간판을 두고 경고도 하고 때로는 강제로 철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도 간판의 밀림을 다스리는 법이나 규칙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법칙이 있고,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다면 우리가 보는 간판의 난맥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우선 간판의 크기와 간판을 내 거는 모양이 자유무방하다. 간판의 문자와 문면과 그림을 보면, 인류의 문자사와 미술사의 전시판과 같은 느낌이 있다.
상품광고가 아닌 환영, 환송, 무슨 무슨 기간, 또 무슨 구호, 표어따위의 애국적 광고물이라고해서 아무데나 붙여도 좋다는 것은 아닐게다. 도심의 거리를 가로질러 사시장철 늘어져 있는 잡다한 현수막, 남대문과 같은 국빈의 허리에 걸린 초대형간판, 그 다음 기왕에 만든 육교에 붙여있고, 앞으로 준공될 육교마다에 걸릴 더 많은 간판들-이런 것은 그냥 두고, 상품광고만 손대거나 도시미관을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끝으로 이 박사가 시작했고 역대 정부가 계속해온 한글쓰기운동은 어떻게 되었는가. 국문과 함께 오자·오기 투성이 한문을 함께 써 붙여서 직성이 풀리는 상인들의 소행은 무지의 소치로 치자. 그러나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정부의 중앙청사에 걸린 유명한 표어가 하나로 대서되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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