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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上자下자' 펴낸 만화가 백성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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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여성팬이 없어요. 제 만화가 재미가 없나 봅니다. 하하."

『장길산』『토끼』『삐리』 등 선 굵은 시대물로 고정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만화가 백성민(53) 씨가 최근 조선 태종 이방원의 왕위 찬탈과 권력 투쟁을 그린 『上자下자』(바다그림판) 를 냈다. 올해 인터넷 만화사이트 n4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재미가 없다"는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우리 만화계는 청소년을 주 독자층으로 하다 보니 아무래도 학원물.팬터지 등이 강세를 띤다.그런 가운데 그의 작품 앞에 따라붙는 '고증에 충실한''진지하고 치열한''한국을 대표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선뜻 '한 권'을 고르는데 부담스러울 수있었다. 붓과 먹을 사용한 고전적인 그림체 역시 한없이 가벼울 것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감수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겸양의 언사인 것 또한 사실이다. 『上자下자』는 인터넷에 연재한 덕인지 한결 대중적이다. 민초들의 삶을 다뤘던 전작과 달리 왕실의 피 냄새 물씬한 권력 다툼을 다룬 덕에 TV 사극을 보는 듯한 잔재미가 짭짤하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로 정한 어린 동생 방석과 세자를 싸고 도는 정도전과 남은. 방원의 왕권을 위한 야망 앞에는 혈육이고 인정이고 없다. 오직 '찍어내기'만 있을 뿐이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그 정도가 더하다. 처가집을 도륙하고 나중엔 며느리인 심씨의 친정마저 씨를 말린다. 한편 '킹 메이커'인 아내 민씨는 통 큰 여걸이면서도 후궁인 효빈 김씨를 투기해 모질게 매질을 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소재는 다르지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대사에, 또 '이기면 상(上) 자의 자리에, 지면 하(下) 자의 자리에 눕게 된다'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어느새 '여인천하'를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여인천하'를 즐겨 보지 않느냐"고 농담을 건네자 그는 "초반부에만 좀 봤다"고 대답한다. 태종을 '간택'한 이유는 "20여년 전에 단편으로 한번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내내 아쉬움이 남더라"고.

또 "권력 찬탈이라는 주제가 우리 현대사와 닮은 점이 많다"는 점도 들었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예나 제나 다 비슷한 모양이지요." 한 페이지를 몽땅 할애하는 식의 대담하고 힘 있는 연출은 여전하다.

그는 현재 『역적 열전』(가제) 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알려진 역적보다는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 한 줄 또는 두 줄로 짤막하게 언급된, 그래서 더욱 그의 작가적 상상력을 간지럽히나 보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전설적인 SF만화 『라이파이』의 작가 산호의 집을 찾아가면서 만화계에 입문했다.

만화에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산호지만 사극의 길을 굳히게 해준 이는 고우영이다. 『일지매』를 예로 들며 "어떤 대하소설보다 더 극적인 만화를 그리시는 분"이라는 찬사에서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그가 앞으로 보여줄 숱한 '극적인' 만화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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