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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림동 쪽방촌, 무너진 삶이 나의 수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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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윤석찬 신부. 2007년부터 서울 중림동 쪽방촌에서 노숙자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윤 신부는 “주님이 나의 다른 계획들을 다 막아버리고 이 일로 밀어 넣으셨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서울 중구 중림동은 과거와 현재, 우리 사회의 모순과 효율이 혼재하는 공간이다. 우선 1892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인 약현성당이 수십 층짜리 현대식 오피스텔과 이웃하고 있다.

 약초를 재배하던 고개에 있다고 해서 약현(藥峴)이라는 이름이 붙은 성당은 병아리를 품은 어미 닭의 모양새다. 한 평 남짓한 쪽방 수백 개를 성당 울타리 주변에 거느리고 있다. 이곳에 노숙자, 실패한 사업가, 오갈 데 없는 질환자 등 무한경쟁의 낙오자들이 흩어져 산다. 중림동 쪽방촌 식구들이다.

 쪽방촌은 가톨릭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윤석찬(51) 신부가 일궜다. 2007년 노숙자 등을 하나 둘 끌어들이기 시작해 지금 같은 ‘한사랑 가족공동체’로 키웠다.

 23일 윤 신부를 만났다. 그는 “노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쪽방 하나씩 전용공간이 제공된다는 점이 중림동 쪽방촌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세 끼 식사, 주일 예배 등은 가급적 함께한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느슨한 공동체다.

 윤 신부는 “어느 정도 자립 의지가 있는 노숙자를 선별해 쪽방 월세(20만∼25만원)와 용돈(5만∼10만원)을 두 달간 지원한다”고 했다. 단 세 달째부터 노숙자들은 알선받은 일자리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월세를 내야 한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쉼터와 달리 규제가 거의 없다 보니 몇 년째 쪽방촌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많다. 현재 식구는 100여 명에 이른다.

 윤 신부와 함께 쪽방촌을 둘러봤다. 성당 옆 샛길로 접어들자 대로변에서 불과 20, 30m 떨어졌을 뿐인데도 풍경은 순식간에 바뀐다. 미로 같은 골목, 찌그러진 주택, 얽히고설킨 전깃줄…. 쪽방들은 대낮인데도 창이 없어 대부분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윤 신부가 한 방의 문을 열었다. 어른 하나가 누우면 더 이상 옴짝달싹 하기 어려운 크기다. 핼쑥한 20대 청년이 누워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뭐하고 있어?” "잠깐 누워 있는데요” “점심 먹었어?” “사랑방(공동체 사무실)에서요” “약은?” “저녁 때 ○○형이 가져다 준다고 했어요.”

 윤 신부는 “일할 의지와 힘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했다. 건강이나 재활 의지 둘 중 하나가 손상된 경우, 혹은 둘 다 꺾인 경우가 문제라고 했다. 특히 마지막 부류, 재활 의지도 육체적 힘도 없는 사람들은 윤 신부처럼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들을 소진시킨다고 털어놓았다.

 “이곳엔 멀쩡하던 사람도 많아요. 경제적으로 파탄 나고 건강까지 잃으면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거나 스스로 버티기 어려우니까 제 발로 가족을 떠나는 거죠.”

 쪽방촌에는 반드시 밑바닥 인생만 있는 게 아니다. 셋 중 둘 가량이 결손가정 등 어려운 환경 출신이지만 나머지는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떠났지만 방송사 PD였던 사람도 있었다. 명문대 출신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윤 신부는 “한 번 부서지고 깨진 사람들이라 그런지 혼자 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자립할 능력을 갖춰 임대주택을 얻어 나갔어도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고, 결국 다시 돌아오곤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큰 탓이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쪽방촌은 망가진 심신을 회복해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하는 장소가 아니다. 윤 신부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사는 삶의 자리”라고 했다.

 윤 신부는 20대 초반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종교의 본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목마름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쪽방촌 공동체는 어떻게 상상하게 된 것일까. 윤 신부는 “하나의 흐름을 읽은 거죠”라고 답했다. 1996년 신부가 된 직후부터 노숙제 문제에 관심을 갖다 보니 쉼터가 해결하지 못하는 틈새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서 고생한다는 번민은 없었을까. 그는 “주님이 나의 다른 계획을 모두 막아버리고 이리로 밀어넣으셨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없을까. 그는 “물론 해결됐죠”라며 웃음을 지었다. 빈자들과의 공동생활이 그에게 수도요, 수행인 모양이다. 고단한 시대의 영혼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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