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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미, 로즈퍼레이드, 한국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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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 경영

“잎새마다 겨울빛이 완연하고/하늘마저 우울한 잿빛/그런 겨울날 나는 캘리포니아를 꿈꾸네.” 마마스와 파파스가 부른 ‘California Dreaming’의 한 구절이다. 노래 제목 그대로 캘리포니아는 미국인들에게, 나아가 세계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래서 ‘분노의 포도’ 등 이 지방을 동경하는 여러 예술 작품도 등장했다.

 캘리포니아가 지니는 특별한 점은 정신적인 리버럴리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캘리포니아를 하나의 주(state)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적 독립 국가로 보기도 한다. 60년대 반전, 무정형의 히피문화가 탄생된 것도 그런 연유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의 대니얼 벨은 캘리포니아를 아예 정신적인 쾌락주의의 발원지로 진단하고 있다. 극단적인 리버럴리즘이 할리우드와 함께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제리 양 등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구루들을 잉태한 자궁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가 꿈의 땅으로 인정받기까지에는 곡절이 많았다.

 124년 전인 1889년, 골드 러시로 서부를 개척한 수많은 노다지 사냥꾼들이 정착하면서 서부 도시들은 발전을 거듭해 간다. 문제는 비즈니스 기회가 아무리 급증해도 동부의 부자 양키들이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자본이 필요한 이곳 사업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묘책을 강구하게 된다. 동부 지역이 블리자드 눈보라에 덜덜 떨고 지내는 절정의 겨울인 새해 첫날, 장미꽃으로 치장한 마차 퍼레이드를 계획한다. 한겨울에도 장미꽃이 활짝 피는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증거로 보여줌으로써 동부의 부자들을 끌어오자는 것이다.

 실제로 혹한에 시달리던 뉴욕이나 시카고에서, 화려한 생화 장미로 장식된 퍼레이드를 보는 심정은 어떨까. 더구나 서양 문화는 장미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장미를 빼고 서양문화를 얘기하는 것은 달을 빼고 이태백을 얘기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도 있다. ‘장미전쟁’도 있고, ‘베르사유의 장미’도 있다. 아이디어는 곧 행동으로 옮겨져 이듬해인 1890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즈 퍼레이드의 탄생 계기다.

 미국의 한 해는 캘리포니아의 로즈 퍼레이드로 시작해 추수 감사절, 뉴욕의 메이시 퍼레이드로 끝난다고 할 만큼 퍼레이드가 주는 의미는 굉장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크고 작은 퍼레이드가 로즈 퍼레이드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장미꽃 행진’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결국 수많은 동부 부자들이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꿈꾸며 서부로 오게 된다. 캘리포니아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이달 초 124년째 ‘로즈 퍼레이드’에 한국 전쟁 참전 용사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뉴스는 초대형 국방부 꽃차에는 6명의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 탑승했다고 전한다. 이들과 함께 워싱턴DC, 한국전쟁 기념비 참전 병사들의 동상을 같은 크기로 본뜬 조형물을 실은 17m 길이의 꽃차는 1만 송이의 장미로 장식되었다.

 미 국방부가 로즈 페레이드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 특히 주제를 ‘한국전쟁’으로 정한 것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참전 용사들에게도 자부심을 심어주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최근 미국 상·하원이 잇따라 ‘한국전 참전용사의 해’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한국전 재평가 작업과 맞물려 있다. 퍼레이드는 또 한국 전통 무용과 사물놀이를 곁들여 지켜본 교포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이처럼 한때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던 한국전쟁이 미국 조야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는 급격히 퇴색되어 가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고귀한 희생이란 말을 꺼내기가 눈치 보이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전쟁에 대한 논란이 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참전 얘기를 딱 끊으셨다. 명절 때면 손자들에게 곧잘 무용담을 들려 주시던 아버지다. 그는 이제 많이 연로하시고, 대처 나들이 길에 징집돼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는 보병 6사단 출신이다. TV를 통해 로즈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 마음은 어떠실까.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