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세대엔 '북경자전거' 이게 있어야 '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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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여행 전문가 한비야씨의 『중국견문록』에 나오는 에피소드 하나. "정말 못 살겠다. 새로 산 중고 자전거가 또 없어졌다. 벌써 세번째다."

자전거 훔치기가 일상화된 중국 베이징(北京) 의 풍경이다. 물론 한씨도 남의 자전거를 슬쩍하는 '모험'에 나선다.

중국의 젊은 감독 왕샤오솨이(王小師.35) 가 연출한 '북경 자전거'의 소재도 한씨의 일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전거 한대를 둘러싼 베이징 젊은이들의 얘기다.

'북경 자전거'는 어떤 면에선 현대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을 닮았다.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피폐한 일상을 그린 '자전거 도둑'과 마찬가지로 '북경 자전거'는 거대한 산업화의 풍랑 속에서 비틀거리는 중국의 오늘날을 은유한다.

시대.공간적 배경,주인공의 신분 등이 판이하지만 자전거 절도라는 작은 사건을 꼼꼼하게 따라가며 전환기의 사회상을 해부해내는 구성력이 뛰어나다.

또 '북경 자전거'의 자전거는 약간 무리해 최근 한국사회의 오토바이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서울 시내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퀵서비스 대열과 베이징 시내를 누비는 자전거 특송직원 물결이 상징하는 것은 비슷하다.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한 단면이다.

오토바이.자전거가 양국의 신세대를 상징한다는 점도 유사하다. 멋드러진 오토바이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신나게 달리는 걸 꿈꾸는 한국의 10대들처럼 베이징의 청춘들은 갖은 자전거 묘기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고 한다.

'북경 자전거'의 주인공은 두 소년이다. 한명은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구웨이(츄이린) 고, 또 한명은 도시의 가난한 학생인 지안(리빈) 이다.

우선 택배회사에 취직한 '촌닭' 구웨이. 일정 기간 열심히 일하면 자전거를 손에 쥐게 된다. 베이징의 뒷골목까지 외우며 페달을 돌려대는 구웨이. 그런데 고대하던 자전거를 갖기 하루 전날, 거리에 세워둔 자전거가 보이지 않으니….

그리고 지안.성적이 오르면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아버지가 번번이 약속을 깬다. 결국 부모가 모아놓은 돈을 훔쳐 자전거를 구입하고는 친구들 앞에서 의기양양해진다.

짐작할 수 있듯 구웨이가 잃어버린 자전거와 지안이 산 자전거는 동일 물건. 구웨이는 지안의 자전거를 다시 훔치고, 지안은 친구들과 함께 구웨이의 자전거를 뺏으려 들고…. 결국 그들은 하루씩 돌려타자는 신사협정을 맺지만 예상밖의 파국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왕샤오솨이 감독은 이같은 자전거 쟁탈전을 통해 산업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그늘을 드러낸다.

구웨이와 지안, 그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곤혹스런 상황을 통해 일방적인 경쟁을 강조하는, 즉 남을 꺾어야 내가 살 수 있는 산업사회의 혹독한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영화의 젊은이들에게 자전거는 생존과 권력, 그리고 욕망의 등가물인 것이다.

메시지는 무겁지만 '북경 자전거'는 결코 버겁지 않다. 구웨이와 지안의 웃지도 울지도 못할 딱한 처지에 가슴이 아프지만 중간중간 경쾌한 장면도 잊지 않고 심어두었다.

그들이 자전거를 돌려타는 장면에선 이란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운동화를 돌려신는 오누이가 연상된다.올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작이다. 12세 관람가.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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