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천하'의 감각 유행어 눈길 '찍어내…'

중앙일보

입력

“내 이 치부책을 나와 오라비들의 목숨을 구명하는 방패가 아니라 너희 두 놈을 ‘찍어내는’ 창칼로 쓰려 함이다.”(문정황후)

“중전 마마,이 사람의 비수에 찔려 쓰러지기 전에는 결코 윤임이나 김안로의 손에 먼저 ‘찍혀져 나가시면’ 아니 되옵니다”(경빈 박씨)

최근 SBS 사극 ‘여인천하’가 정적(政敵) 을 제거하기 위한 숨막히는 두뇌싸움을 펼치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지난 5·6일 방영분의 시청률은 48%를 넘어 방영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사가 ‘찍어 내다’다.‘제거하다’‘숙청하다’라는,사극에 더 어울릴 듯한 단어가 있는데도 등장 인물들이 한결같이 서로를 향해 이 단어를 내뱉는다.

‘찍어 내다’의 사전적 의미는 '꼬챙이 같은 것으로 찍어서 내다(내보내다) ’이다.정확하게 ‘핀포인팅’을 해 제거한다는 뜻이지만,어감상 도끼 등으로 나무 등걸 따위를 찍어서 쓰러뜨리는 이미지가 더 강하게 떠오른다.

이런 미묘한 뉘앙스는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작가의 세심한 고려를 통해 선택된 것이다.

유동윤 작가는 “한자어 대신 의미가 강렬한 우리 말을 찾다가 ‘찍어 내다’에 이르렀다”며 “정쟁을 긴박감 넘치게 묘사할 수 있는 어휘라 식상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밌는 것은 이 단어가 드라마를 벗어나 일상 대화에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인천하’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서 이 용어가 인기라고 한다.

최근 내홍을 겪고 있는 민주당의 한 의원이 당무회의에서 “몇몇 사람은 찍어내야 한다”고 말한 뒤 정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인천하’는 폐서인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던 중전이 뇌물 액수가 적힌 ‘치부책’을 기발한 방법으로 임금에게 전달하면서 반전 국면을 맞았다.이제부터 칼을 쥔 중전이 본격적으로 음해 세력을 ‘찍어 내는’ 과정이 펼쳐질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차기를 둘러싼 힘 겨루기에 이어 내년엔 대선과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으니 이 ‘찍어내다’라는 표현이 더욱 유행할 지도 모르겠다.드라마와 현실 정치에서 누가 어떻게 ‘찍혀 나가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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