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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없는 것은 죽은 것"

중앙일보

입력

"흐르고 움직이고 떠나는 내용, 멀고 높은 곳을 지향하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변화가 없이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8~21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초대전을 여는 정연희(56) 씨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과 영적인 초월을 향한 비상을 주제로 한 회화들을 보여준다.

정씨는 서울대 회화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에서 활동 중인 전업작가. 국내외에서 27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국 샌호제이 미술관.트리톤 미술관.국내 호암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된 중견이다.

이번의 열번째 국내전엔 지난해와 올해에 걸친 신작 40여점을 출품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1층에 전시되는 4.8m 길이의 대작'깨어있는 도시'. 대도시(뉴욕) 의 밤풍경이지만 허공에는 물고기 몇마리가 빛무리에 싸인 채 수직으로 떠오르고 있다. 입을 벌린 물고기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하늘로 오르는 죽은 자의 영혼같다.

길고도 깊이있는 원근감은 장려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그의 작품에는 '영혼의 물고기'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1995년께 옐로스톤 공원에서 일어났던 산불의 잔해에서 탄생한 이미지다. "까맣게 타버려 생선뼈처럼 보이는 나무들에서 하늘을 향해 목마르게 팔을 벌리고 있는 생명과 영혼을 보았습니다."

지하전시장엔 성당의 빛무리를 그린 '산타 소피아', 떠다니는 배나 여행하는 영혼을 그린 '오디세이 시리즈'가 들어선다. 천장에서 아래로 휘어지며 늘어뜨리는 독특한 천장화다. "1년여 동안 침대에만 누워계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천장에 그림을 그려 드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발단이 됐습니다."

그의 작업방식은 독특하다. 물에 적신 캔버스에 엷은 물감을 부어 배경색을 만든다. 번져나간 모양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추상화를 이루고 그 위에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게 된다.

2층에선'모든 소리로' '백야' 연작을 보여준다. 알루미늄 판에 인쇄용 롤러로 물감을 밀어 지하수로의 벽면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표면을 만들어낸다. 물감이 안묻은 부분이 반사하는 빛의 마티에르도 독특하다. 배, 사다리, 기하학적 도형은 등장하지만 초월적인 분위기가 더 국지적인 현상 처럼 나타나는 점이 다르다.

작가가 믿는 기독교의 감성은 모든 작품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기자를 포함한 비기독교인 관객들의 마음도 함께 어루만져 주는 힘을 갖고있다. 영적이고 정갈한 감성은, 계산적이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에 가장 결핍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02-73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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