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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감독 "무협으로 중국을 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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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상업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산업의 기초를 생각했다." 장이머우(張藝謀.53) 감독의 입장은 분명했다. 빠짝 깎은 머리, 단호한 인상, 또렷한 말투, 어느 한구석도 빈틈 없어 보인다.

'영웅'(24일 개봉)에서 날카로운 칼날로 물방울을 베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흰 붓을 둘로 가르는 등 장면 장면에 치열한 집착을 보였던 그의 스타일 그대로다. 장이머우가 지난 14일 방한했다.

작년 말 각국 기자를 베이징(北京)에 초청, 대규모 시사회를 열었던 그가 이번엔 거꾸로 주연 배우 량차오웨이(梁朝偉).장만위(張曼玉)와 함께 서울을 찾았다.

지난달 오페라 '투란도트' 관계로 한국을 다녀간 지 한 달도 안됐으니 신작에 거는 그의 기대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진 연구.개발용(R&D)영화를 찍어왔다. 즉, 예술영화에 매진했다. 그러나 영화가 발전하려면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존해야 한다. 한국에 오기 직전 대만에 들러 '비정성시'의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과 대담했는데, 그도 의견이 같았다. 일부에선 상업감독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지만 작품 세계가 달라진 건 아니다. 예술영화는 언제든지 찍을 수 있다."

'영웅'은 장감독의 필모그래피(연출작 목록)에서 단연 튄다. 그가 처음 도전한 무협영화라는 점에서 신기하고, 방대한 스케일과 신출귀몰한 액션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즐겁다.

'붉은 수수밭''국두' 등 초기작의 특징인 화려한 색채가 더욱 도드라진 반면 '귀주이야기''인생''책상서랍 속의 동화''집으로 가는 길' 등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소박한 사실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후샤오시엔도 무협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무협은 중국영화의 독특한 전통이다. '와호장룡'이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면서 무협물 시장이 넓어지고, 이에 투자하겠다는 돈도 몰려들고 있다. 무협영화를 한편 더 만들 계획도 있다."

'영웅'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의 춘추전국시대 얘기다. 주변국을 침략하는 진나라 왕 영정(후에 시황제)을 암살하려는 자객 네 명을 둘러싼 우정과 사랑이 붉은색.파란색.흰색의 영상으로 펼쳐진다. 등장인물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메뚜기떼처럼 날아드는 비화살을 칼과 창으로 막아내고, 칼을 호수에 내리쳐 생긴 반발력으로 하늘로 치솟는다.

영정을 암살하려는 고아 출신의 무사 무명(리롄제.李連杰)과 이를 막으려는 파검(량차오웨이)의 호숫가 결투가 압권이고, 파검의 연인이면서 영정 문제에선 대립하는 비설(장만위)과 파검을 사모하는 여월(장쯔이.章子怡)이 낙엽이 뒹구는 들판에서 격돌하는 장면은 시적(詩的)이다.

"같은 무협이라도 낭만적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홍콩식 와이어(피아노줄) 액션의 도움도 많이 받았으나 영상미.색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두었다. 고수임을 확인하려고 죽고 죽이는 흔한 무협물과 달리 싸움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협(俠)의 문제를 다뤘다."

그는 영화의 주제를 지기(知己)로 요약했다. 친구보다 더 가까운 친구, 자기의 생명도 내줄 수 있는 친구를 그렸다는 것. 그래서 적대 관계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과장된 스타일이 거슬린다고 물었다. 영화는 멋있지만 그 탓에 말하려는 내용이 다소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특징이자 메시지"라며 "모든 걸 완벽하게 담아내는 영화는 없다"고 답했다. 밥 한술은 맛있으나 많은 밥을 입에 넣으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고 비유했다.

'영웅'은 중국 문화의 전시관 같다. 서예.바둑.비파.무예 등 전통문화부터 웅장한 진나라 궁전까지 마치 21세기판 중화사상을 홍보하는 듯하다.

"서양에 중국을 알리고 싶었다. 무(武)와 서(書)의 원리가 같다는 걸 서양인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무협영화의 반응이 좋고, 또 청룽(成龍).저우룬파(周潤發).리롄제 등 무협스타의 인기도 높다."

그가 초호화 캐스팅을 동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무명 배우 궁리(鞏).장쯔이를 발굴해 세계적 배우로 키웠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홍콩 출신의 스타를 대거 불러들였다.

동일한 사건, 동일한 인물을 놓고도 장면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는 가변적 시점을 사용한 것도 '영웅'의 특징이다. 그는 "이런 기법은 예술영화에서 흔히 사용된다.

다만 무협영화에선 처음이다. 홍콩영화와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고 설명했다. "영정이 폭군으로 알려진 시황제와 달리 현자 분위기가 난다"고 하자 "영화는 상상일 뿐이다. 요즘 중국인은 좀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를 희망한다"고 대답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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