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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부상 딛고 땀으로 일군 특급투

중앙일보

입력

"마운드에서의 내 모습이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커트 실링(34.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은 자신의 이름 앞에 '영웅'이 붙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다.그는 "다이어트를 하면서도 감자칩을 마구 먹어 체중이 더 늘었다.이래도 영웅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1점대를 밑도는 경이로운 포스트시즌 방어율을 기록하며 첫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노리는 실링이 범상한 사람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비온 뒤 땅이 굳는다.

실링의 지난 14년 동안 야구 인생은 늘 그래 왔다.그에게서 위기는 절망과 패배를 안겨주기보다 한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힘과 용기를 북돋웠다.

실링은 1988년 아버지 클리프 실링을 잃었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실링의 요람 옆에 공과 글러브를 가져다 놓을 정도로 지독한 야구광이었다. 부친의 사망 이후 8개월 뒤 실링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유니폼을 입고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 입성했지만 좀처럼 성적을 내지 못하며 마이너리그를 오르내렸다.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링의 방황은 아내 숀다를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종지부를 찍었고 92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옮기면서부터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실링은 99년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은 뒤부터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지난해 실링은 시즌 종반 5연패를 기록,거액을 주고 그를 영입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를 실망시켰다.시즌 직전인 지난 3월 아내마저 피부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실링은 꺾이지 않았다.집과 스프링 캠프를 매일 오가면서 아내를 돌봤고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결국 아내의 병은 완치됐고 자신은 22승6패.방어율 2.98, 생애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는 "시련을 겪으면서 나는 점차 훌륭한 투수로 성장하는 동시에 인간적으로 성숙해졌다"고 자평한다.

◇ 성공의 비밀

실링은 타고난 천재형이라기보다 끊임없는 노력형 투수다. 그는 경기가 끝나면 모든 투구 내용을 노트북 컴퓨터에 직접 입력한다.95년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데이터의 분량은 CD로 90개나 된다.또 메이저리그 모든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존을 분석한 자료도 따로 만들었다.

팀의 공격시 실링은 더그아웃에서 산더미같이 뽑아놓은 자료를 보면서 다음 이닝 상대 타자와의 수싸움을 미리 그려본다. 그러나 정작 실링은 "타선의 도움이 컸고 야수들의 호수비 덕을 많이 봤다"고 겸손해 한다.

◇ 절친한 라이벌(?)

60년대 LA 다저스의 샌디 쿠펙스.돈 드라이스데일 이후 메이저리그 최강의 원투 펀치 실링과 '빗유닛' 랜디 존슨은 팀의 에이스 자리를 다투는 사이다.그뿐이 아니라 실링과 존슨은 올해 사이영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두 사람은 라이벌인 동시에 친한 친구로 알려졌다.존슨이 지난달 1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포스트시즌 7연패를 기록하자 제일 먼저 그를 위로한 사람은 실링이었다.실링은 존슨에게 "너는 내 목표를 높여준 유일한 사람이다.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존슨은 지난달 17일 챔피언십 1차전에서 보란 듯이 승리를 거둔 뒤 "포스트시즌 첫 승리에는 실링의 조언과 격려가 제일 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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