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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중국 경제 대장정] 첨단 기관차 '학판 기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IBM이 중국 PC시장에서 절절 매고 있는 상대는 델이나 컴팩이 아니다.'IBM쯤 안중에도 없다'는 식으로 5년 연속 중국 내 톱을 지키고 있는 곳은 롄샹(聯想)이다.

IBM은 또 2위인 팡정(方正)에는 더블스코어로 처지고 있으며 4위인 퉁팡(同方)에도 추월당할 판이다. 다국적기업 IBM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롄샹.팡정.퉁팡의 오너는 누구일까. 세곳 모두 국립대학이나 연구소가 주인이다.

롄샹은 1984년 국가기관인 중국과학원의 계산연구소가 20만위안(약 3천3백만원)으로 창업한 기업이다. 연구소가 개발한 중국어시스템 기술을 무기로 PC를 생산, 중국에서 30% 이상을 독식하고 있다.일본을 제외한 아태지역에서도 10.4%를 차지해 IBM.삼성.컴팩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있다.

팡정은 베이징(北京)대,퉁팡은 칭화(淸華)대가 각각 설립한 기업이다. 명문대의 기술연구를 뿌리삼아 중국 정보통신(IT) 산업을 주무르고 있다. 경영도 계열사들을 지주회사를 통해 그룹화하는 등 웬만한 한국 재벌 뺨친다.

"대학은 알을 낳아 부화시키는 암탉입니다.이왕 알을 낳으려면 황금알을 낳아야죠."

칭화대 바이훙례(白洪烈)교수는 학교를 소개하면서 '상아탑'이나 '학문의 전당'이라는 표현을 한번도 쓰지 않았다. 그는 교수이지만 강단에선 완전히 떠나 칭화대학기업집단에서 출자기업 관리를 맡고 있다.

칭화대학기업집단은 칭화대가 95년 1백% 출자해 설립한 일종의 지주회사다. 그때까지 학과별로 주렁주렁 거느려오던 기업들을 계열화해 통합관리하고 있다.

대학이 재벌총수인 셈이다. 계열사가 30여개나 되고 상장사도 7개가 나왔다. 그중 잘 나가는 기업은 번 돈을 다시 대학 연구예산으로 내놓는 게 관행처럼 됐다.

이 대학 박사과정 유학생 은종학(殷鍾鶴)씨는 "뚜렷한 산학연계모델 없이 확 달아올랐다 식어버린 한국의 벤처와는 달리 뿌리가 탄탄하다"고 말한다.

칭화대뿐 아니라 중국의 대학은 80년대 초부터 학내에 직접 공장을 세워 생산활동을 했다. 처음엔 학교경비 충당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다 첨단분야에서 성공하는 기업들이 나오자 중국 정부는 아예 교육개혁 및 기술향상 차원에서 대학의 사업을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특히 베이징.칭화대는 시범대로 뽑혔다. 이에 따라 학교가 출자하고 교수가 사장이 돼 직접 회사를 경영하는 '학판(學辦)'기업들이 자리잡게 됐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대학이 개발한 첨단기술을 '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신속히 산업화했다는 데 있다.

기업으로 옮긴 교수는 강의를 하지 않고 연구와 경영에만 전념토록 한다.필요한 고급인재는 대학에서 바로 끌어쓴다. 이것이 학판기업이 앞선 기술력을 갖게 되는 비결이다.

학판은 대학과 기업이 협력한다는 산학협동과도 개념이 다르다. 협동에는 시간이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므로 아예 대학이 직접 기업을 차린 것이다. 국립대학들이므로 뒤에는 결국 정부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백면서생 교수가 프로의 세계인 경영이나 마케팅을 잘 하겠는가하는 의문도 든다. 이에 대해 팡정그룹 스첸(施□)홍보부장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려우면 외부 전문가에 맡기면 되죠. 어차피 고객이 인정해주는 것은 포장(마케팅)보다 기술입니다.팡정그룹은 이름 그대로 '바르고 정확한(方正)' 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는 궁금증은 팡정인터내셔널의 관샹훙(管祥紅)사장을 만나 풀었다. 그는 베이징대 교수가 아니라 경영감각을 갖춘 엔지니어였다.

교수보다 프로경영자가 필요할 때는 학판기업이라는 틀에 구애받지 않고 융통성있게 사람을 쓴다는 얘기다. 학교도 결과만 따질 뿐 경영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다.

학판은 이제 IT 불황의 돌파구로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중국을 찾은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학판시찰단의 한 교수는 "중국의 IT산업 수준이 단시간 내 높아진 데는 학판기업의 힘이 컸다"며 "경쟁력의 원천을 연구개발센터인 대학에 두고 있다는 점이 특히 IT기업으로서 유리한 점"이라고 말했다.

대학은 재학생들의 창업지원에도 열심이다. 영업허가 수속을 대신해주거나 벤처캐피털을 알선해주는 건 흔한 일이다.

칭화대 캠퍼스 내엔 아예 쉐옌(學硏)타워라는 학생벤처 창업용 건물이 따로 있다.

이곳에 3년 전 간판을 내건 스메이러(視美樂)는 벌써 상장을 준비 중이다. 대학원생 3명이 창업해 사무용 프로젝터를 일본제의 절반값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크겠다 싶자 대기업인 디이(第一)백화점 등이 5천만위안이나 출자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부자가 돼 집 사고 차 바꾼 교수나 학생이 부지기수란 게 학교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학판을 두고 교수.학생이 돈독이 올라 기초학문에 소홀하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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